지금 나는 당신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는 중이야. 아주 강렬했지. 볼터치까지 한 완벽한 화장과 인조 속눈썹을 붙인 눈, 잔뜩 부풀려서 잘 손질한 머리, 나긋나긋한 손가락, 해사한 눈웃음. 고백하자면 그런 사람을 눈앞에 가까이 보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어. ‘저 모습으로 요양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야간근무를 한다고? 아, 난 망했다. 어라, 혈당측정기를 어떻게 다루는지조차 모르잖아. 뭐? 근육주사 한 번 놓아본 적이 없다고? 아이고, 수액의 종류조차 모르잖아. 저 사람에게 일을 맡길 수가 없으니 내가 그 일까지 다 해야 하는 거잖아. 도대체 병원은 어쩌자고 저런 사람을 뽑은 거야’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지.
그러니 당신에게 건네는 내 말투는 딱딱했고 시선은 차가웠지.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면서 실수할까 봐 조마조마했고, 모르는 일들은 기본 원리부터 가르치려고 빡빡하게 굴었지. 그때의 내 모습에 대해 당신은 당신대로 ‘저렇게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인간을 만나다니 망했구나.’라고 생각했다며? 하하.
내가 당신에게 마음을 열게 된 것은 사람들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였어. 새벽에 병실을 돌면서 혈압을 재고 혈당을 재는 일을 하는 바쁜 와중에도 노인 환자들에게 웃으면서 아침 인사를 건네고 간병사들에게도 친근하게 말을 주고받았지. 어느 때는 거의 수다 수준이라서 바쁜 새벽에 일이 더디게 진행되어서 내 속을 터지게 했지만, 사람들은 당신이 오는 아침을 기다리고 반가워했지.
마음을 완전히 열게 된 계기는 따로 있어. 어느 날 밤 임종을 앞두신 분이 계셨지. 그런 날은 더 긴장되고 곤두서기 마련이라 나는 더 예민해져 있었지. 보호자들이 도착하고 의사의 사망선고가 있고 장례식장으로 모시기 전에 몇 가지 절차가 남아 있었지. 파트너인 당신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고 동동거리면서 혼자 일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당신이 보이지 않는 거야. 나는 짜증이 확 치밀었지. 어디 갔나 찾아보니 당신은 돌아가신 분 옆에 있더라고.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오기 전에 몸을 반듯하게 펴 드려야 해요. 금방 굳어버려요.“
보통 요양병원에 오래 입원하신 분들은 관절과 근육이 굳어 팔다리의 구축이 있는데 당신은 이미 죽은 사람인 환자의 팔다리 모두 반듯하게 펴 드리고 자손들 시켜 눈도 감겨드리고 홑이불도 판판하게 잘 덮어 드리고 있었어.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시신에 대한 두려움이 있던 때였는데 당신은 나와 달리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듯 정성을 다해 죽은 자를 돌보고 있는 거야. 그때 병원에서 마무리해야 할 절차만 신경 쓰고 있던 내 머릿속에서 디잉 큰 종소리가 울렸어.
그 후로 나는 당신을 달리 보기 시작했지. 여전히 일은 서툴고, 그래서 나는 여전히 신경이 곤두서곤 했지만. 같이 일을 하는 날이면 마음이 편했어. 가끔 달달한 빵을 가져와서 내 마음을 녹인 것도 한몫하긴 했지만 내가 뭐 단지 빵 몇 조각 때문에 당신이 좋아진 것은 아니야.
오래 같이 일하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 당신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났지. 그리고 우리의 관계는 우정으로 피어나기 시작했어. 직장동료에서 밥을 같이 먹고 술을 같이 마시는 친구 사이가 된 거지. 당신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음주를 다시 배우고, ‘레너드’에서 같이 음악을 들으면서 유흥을 익히게 되었지. 어쩌다 보니 젊은 시절 친구 하나 만나지 못하고 20여 년을 전전긍긍하며 숨 막히게 살아온 내게 같이 놀 수 있는 친구가 생긴 거야.
당신이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잘 지낸다고 천진난만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사는 일에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도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이미 많은 걱정의 강을 건넌 나보다 한 수 위 고수 같아 보였지. 열 개의 마음의 팔마다 근심거리를 붙잡고 앉아 안절부절못하던 내가 당신 덕분에 두려움 몇 개는 살짝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법을 알게 되었어. 비워야 새로운 것이 들어온다는 것을 알게 된 거지.
버드와이저 두 병으로 거나하게 취했던 지난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들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지. 이제는 친구가 되어 같이 밥 먹으면서 고상과 천박 사이의 백 가지 장르를 넘나드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깔깔 웃는 사이가 되었지. 같이 울컥하고 같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블랙 코미디 같은 농담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이가 되었지.
병원 출근 첫날, 당신의 기다란 인공 속눈썹말이야,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당신의 슬픔이 눈으로 내려앉지 못 하게 하는 처마였나 봐. 어제는 처마가 없더라. 그래서 그랬는지 당신의 눈에서 누수가 심하더라고. 얼른 지붕 보수 공사해서 더 길고 멋지게 휘어 올라가는 처마를 매달아 봐.
이제는 무엇을 해도 외롭지 않을 수 없는 나이가 된 것 같아. 기쁨을 온전하게 기쁨으로 맛보는 천진난만한 시절은 지났지. 달콤해서 사탕이 좋았을 때는 가버렸지. 뜨겁게 녹아 솜사탕처럼 엉키는 것, 혀끝의 달콤함 뒤에 손끝의 찐득함으로 남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우린 알지.
물기 척척한 장마도 지났으니까 서러운 일은 잊읍시다. 다 잊으면 눈물도 안 나와요. 비록 파릇파릇한 청춘도 지나고 울울창창한 삼사십 대도 지났지만, 우리 아직 초록이 무성한 깊은 숲이잖아. 우리는 이제 어떻게 파릇 거릴 수 있는지 어떻게 울창할 수 있는지 다 알잖아. 그러니 젖은 눈을 닦고 우리의 숲을 잘 가꾸어 봅시다. 가시덩굴은 쳐내고 잡초는 베어버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