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빛으로 피는 꽃

반조화(返照花)

by 최희정


​우리 집은 동향이다. 아침이면 거실로 길게 해가 들어왔다가 한낮이 되기 전에 빛이 빠져버린다. 오후에는 실내에 자연의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아파트 건물 뒤편은 하루 중 대부분 응달이다. 낮에는 건물이 해를 가리고 오후 늦게부터 저녁까지 잠깐 해가 든다.


​날이 풀리면서 봄답게 여기저기 꽃들이 많다. 땅 가까이 납작 피는 민들레와 제비꽃을 비롯해 여러 가지 풀꽃들이 발끝에 스친다. 무릎 언저리에는 수선화며 튤립 같은 알뿌리 식물들이 꽃 자랑에 나선다. 허리쯤에는 앵두나 조팝꽃이 강정에 붙은 튀밥처럼 달달하고 바삭하다. 눈높이에는 개나리가 지천이고 사람의 키보다 높은 곳에는 매화며 살구나 산수유가 가득하다. 고개를 쳐들고 올려다보게 되는 곳에는 벚꽃이 하늘 인양 펼쳐져 있다.


이렇게 햇볕 한 줌으로도 꽃봉오리가 열리는 봄에도 아파트 뒤편은 쓸쓸하다. 그늘이 많아서 아침과 낮에 해가 드는 앞쪽보다 식물들이 잘 자라지 못한다. 땅에는 풀이 듬성듬성하고 벌건 흙이 많이 보인다. 나무들도 잎이 무성하지 못하다. 항상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그래도 봄이라고 얼마 전부터 가지 끝에 연두가 돋아 있는 것이 보이긴 한다. 이파리들이 성기게 자라고 있었다.


며칠 전 저녁 무렵 산책을 하려고 운동화를 꿰신고 나섰다. 현관문을 열자 진한 노랑에서 주황으로 넘어가려는 저녁 빛이 눈앞에 흥건했다. 그때 오래된 뿌연 유리창 너머로 도드라지게 보이는 선명한 무엇이 있었다.


키만 멀쑥하게 큰 이파리 성긴 나무에 빛나는 것이 보였다. 가지에 작고 또렷한 빛이 구슬처럼 맺혀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유심히 보니 벚꽃이었다. 해를 잘 받는 곳에 핀 것과 달리 여러 송이가 소담스럽게 피지 못하고 드문드문 한두 송이씩 달린 꽃들이 노을 속에 빛나고 있었다. 한 송이 한 송이가 빛을 한껏 빨아들인 모습이 조그맣고 동그란 알전구를 조로롱 매달아 놓은 것 같았다.


​반조(返照)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빛이 반사되어 되쪼이는 현상, 또는 그 빛을 반조(返照)라고 한다. 어스름 저물녘에 동쪽으로 되비치는 햇빛도 반조라고 부른다. 반조는 한낮의 햇빛보다 촘촘하지 못하다. 나무는 저녁으로 가는 묽은 햇빛이나마 열심히 충전하여 가지 끝에 작은 등불을 밝히고 있었다. ​


​마음에도 그늘이 질 때가 있다.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걱정거리가 생기면 마음속 응달은 깊어진다. 이럴 때 누군가가 건네는 위로의 말 한 마디나 따뜻한 차 한 잔은 어둑한 마음에 비치는 반조(返照)​다. 그 빛으로 힘을 얻게 된다. 기운을 모아 마음의 등불을 다시 켜고 일어서게 된다.


​하루 대부분을 시무룩하게 그늘에 젖어있다가, 해가 질 무렵이 되자 노을빛 한 모금 마시고 기운을 차려 피어난 꽃들을 반조화(返照花)라고 불러주고 싶다. 반조화(返照花)는 낮의 꽃보다 더 환하게 빛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