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들이 처음에 글자를 익힐 때 연필을 사용한다. 어른들이 써주는 자기 이름을 그림을 베껴 그리듯 그린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 되면 한글의 자음과 모음 쓰기를 배우고 가로 세로로 칸이 나누어진 공책에 쉬운 단어를 여러 번 쓰면서 글자를 익히는 연습을 한다. 연필은 누구나 쉽게 구해서 글을 쓸 수 있는 필기도구이다.
지난봄 읽었던 어느 책에 연필에 대한 글이 있었다. '연필을 깎으며'라는 제목의 그 글은 연필 애호가의 연필 예찬론이다. 그 글을 쓰신 분은 연필을 얼음처럼 굳은 머리를 서서히 다정하게 녹여주는 영감의 도구라고 했다. 그분이 애호하는 연필의 종류도 언급했는데 해외의 유명 필기도구 회사들이 만든 좋은 나무와 흑연들로 만든 연필들이었다.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종류였다. 내가 기억하는 고급 연필은 어릴 적 잘 사는 친구들이 쓰던 분홍 지우개가 달린 노란 연필 정도인데 그분이 쓴 글에는 손에 쥐기 만해도 좋은 글이 써지고 멋진 필체가 나올 듯한 연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요양병원 간호사로 일한다. 직업상 연필을 많이 사용한다. 요즘은 병원도 환자의 여러 상황이나 처치에 대해 다 전자기록을 한다. 그러나 전자기록을 하기 애매한 전달사항이나 중요한 점들은 카덱스라고 하는 것에 연필로 기록한다. 카덱스 카드는 A4용지 반 정도 크기의 두꺼운 종이로 만들어져 있다. 이 카드는 입원한 환자 한 명당 하나씩 만들어져 있다. 이름과 나이 성별 그리고 병명과 입원하게 된 이유 등은 지워지지 않게 볼펜으로 쓴다. 하지만 입원 후 매일매일 일어나는 처치와 치료는 이 카드에 연필로 쓴다. 여기에 쓰이는 기록들은 교대근무를 하는 다음번 근무자에게 전달되는 자료이다. 간단한 메모 형식인 이 기록들은 주로 그때그때 새롭게 덧붙여지는 내용인데 이삼일 지나 환자 상태가 변하면 지워버린다. 어떤 때는 하루에도 여러 번 썼다 지우기를 반복해야 하니 연필로 기록하고 지우개로 지운다.
병원에서 제공하는 연필은 문구점에서 흔히 살 수 있는 것들이다. 병원 원무과에서 대량으로 구입하여 각 병동별로 나누어준다. 그런 연필을 초등학생용 기차 모양 연필 깎기 기계로 드르륵드르륵 깎아서 사용한다. 가끔은 특이한 연필들이 보인다. 직원들이 집에서 아이들이 어릴 때 쓰던 연필을 가져올 때이다. 요양병원에는 결혼 후 육아 때문에 일을 그만두었다가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난 후 다시 취업을 한 사오십대의 여성 간호사가 많다. 그러다 보니 집 정리를 할 때 아이들이 어릴 때 쓰던 연필을 찾게 되면 한 움큼씩 들고 온다.
귀여운 노랑 병아리가 그려진 연필도 있고 멋진 자세의 로봇 그림이 그려진 연필도 있다. 토끼 얼굴 모양의 지우개가 달려있다던가 꽤 고급스럽고 특이한 연필들도 가끔 나타나는데 이런 연필들로 동료직원의 딸이 예쁜 연필을 사서 모으는 취미가 있었던 역사를 알 수 있다.
카덱스에 기록되는 내용은 아주 다양하다. 며칠 전에는 새벽 두 시에 6호실 할머니께서 시아버님 제사를 준비하러 가야 한다고 보따리처럼 묶은 수건을 이고 나왔다고 쓰여 있었다. 10호실 거동이 불편한 아흔 살 할아버지가 모내기 끝났으니 주전자에 막걸리를 받아오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는 내용도 있었다. 아침에 매일 혈당검사를 받던 3호실 할머니께서 갑자기 화를 내면서 왜 내 몸의 피를 빼가느냐고 버럭 욕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흥이 많아 노래도 잘하시는 할머니는 오래 당뇨를 앓다 입원하셨다. 그래도 아직 앉아서 밥 드시고 잘 걸으시니 병원에서는 건강한 환자에 속한다. 그러니 우리는 할머니가 또 욕을 하셨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웃는 얼굴이다. 이런 것에 대해 인계를 주고받을 때는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의 할아버지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 든다.
지난봄에 코로나로 면회가 금지되었을 때 할머니 한 분이 연필과 종이를 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분이 다시 가져온 종이에는 맞춤법이 맞지 않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자식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쓰여 있었다. ‘어마가 너그들 보고시꾸나.’ 라는 짤막한 글을 읽으며 마음이 오래 뭉클했다. 간병사들도 가끔 연필을 빌려 가기도 한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고려인 3세 간병사는 우리말을 듣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쓰는 그것은 못 한다. 그녀는 연필을 빌려 가서 ‘소변’, ‘식사’와 같은 병원에서 필요한 간단한 한글을 연습한다. 러시아어 단어 밑에 써진 서툰 한글을 보면 일제 강점기에 궁핍한 고국을 떠나 연해주에 살다 갑자기 우즈베키스탄까지 쫓겨난 가난한 백성들이 겪은 수난의 역사를 마주하게 된다.
교대근무를 하는 간호사들이 인계를 할 때 노인환자들의 소소한 일상 기록은 서로 편안하게 주고받는다. 별일 없이 병원 생활을 하는 환자의 카덱스는 쓰여 있는 내용도 간단하고 비교적 깨끗하다. 그러다가 환자 상태가 안 좋아지면 새로 써지는 내용도 많아지고 복잡해진다. 갑자기 열이 난다던가 혈압이 떨어지면 새로 투약되는 약 이름도 쓰고 변하는 환자 상태에 대한 기록이 늘어난다. 더욱 급격하게 상태가 악화되고 보호자들이 임종 면회를 오는 상황도 이 종이에 기록된다. 연필로 쓰고 지우 고를 반복하면서 빳빳하던 종이 카드가 후들후들해진다. 마치 나빠지는 환자 상태처럼 심란해진다. 깨끗하던 종이 색도 거무튀튀하게 변한다. 어두워지는 환자의 미래처럼 얼룩이 많은 카덱스는 열심히 지워도 검버섯 같은 흔적이 남는다.
오래전에 인기 있던 어느 가수는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라는 가사의 노래를 했다. 사랑이 식으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 연필로 쓰라고 했다. 젊은 날 사랑의 추억은 깔끔하게 지워지겠지만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환자들의 병원 기록은 연필로 썼다가 지우기가 반복될수록 쓸쓸하고 먹먹하다. 처음에 언급한 글의 저자는 연필의 소명은 소멸이라고 했다. 그분의 말처럼 우리들의 삶도 연필처럼 세월의 파도에 긁히면서 뭉툭해진다. 그러다가 시간의 칼날에 깎이고 깎여 몽땅 하니 짧아져 사라지는 과정을 겪는다. 마지막에는 스스로의 머리에 달린 지우개로 살아온 시간을 지우며 사라지는 것이 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