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사람
이 땅에 돌아온 어느 고려인의 삶
몇 년 전 비 오던 새벽, 잠겨있는 병동 입구 유리문 앞에 누가 서 있었다. 검은 잠바를 입은 작은 키의 나이가 꽤 있는 남자다. 무서워서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다.
“누구세요?”
“우즈베키스탄, 우즈베키.”
“누구 찾아왔어요?”
“우즈베키스탄, 우즈벡.”
그는 우리말을 못 하는 눈치다. 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니 환갑 가깝거나 넘었을 나이다. 그는 살면서 한국말을 별로 접해보지 못한 것 같았다. 사는 동안 우즈베키스탄 어로 말하고 들었던 이 사람은 내가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잠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종이 쪼가리를 꺼낸다. 우리 병동에서 일하는 간병사의 얼굴이 있는 사진이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고 사진 속의 간병사를 깨워서 데리고 나왔다.
취직할 수 있다고 해서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단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곧장 왔단다. 일곱 시간 타고 왔단다. 이 땅에는 아는 사람도 갈 곳도 없단다. 마침 비가 오고 있다. 부슬부슬 부슬부슬. 찜질방도 모르고 지리도 모르니 찜질방 가서 자고 내일 오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빈 사무실에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겠단다. 할 수 없이 한쪽에 간이침대를 놓아주었다. 잠바만 벗고 거기 눕는다.
이 남자의 아버지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어머니는 망한 나라의 배고픈 백성이어서 척박한 반도 땅을 떠나서 러시아로 갔을 것이다.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의 이주와 삶은 그렇게 시작된다. 1860년대 후반 조선 동북부 지역의 대기근으로 이들은 두만강을 넘어 조선을 떠나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해서 ‘신한촌’을 이루며 살다가 1937년에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우즈베키스탄보다 더 멀리 동유럽까지 가서, 요즘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고역을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에서 정착하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한밤중에 잠을 자고 있다가 갑자기 소련 경찰이 들이닥쳐 기차역까지 끌려가 화물열차에 짐승처럼 실려 어디론가로 출발했다고 한다. 말과 소를 운반하는 화물열차 1칸에 80명 정도가 탔는데 물도 없고, 화장실도 없어서 기차가 서면 기차 밑에다 대소변을 보고, 급하면 한쪽에 뚫어놓은 구멍에 대고 볼일을 봤으며 배가 고파서 사람들은 기차가 서면 인가에 뛰어 들어가 먹을 것을 구해 먹기도 했다. 결국 먹지 못해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았다고 당시의 생존자들은 증언한다. 그 당시 어린아이의 절반 가까이가 기차 안에서 죽었다고 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었다.
50일 가까이 화물열차에 실려 6천 km에 달하는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에 내버려진 17만여 명의 연해주 고려인들의 삶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무참했다. 허허벌판에 내버려져 집도, 가구도, 농구도, 돈도 없이 땅굴을 파고 추운 겨울을 견뎌야 했다. 이주 초기 어린이와 노인 1만여 명이 토질병이나 추위로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중앙아시아 일대로 추방된 조선인들은 황무지였던 곳을 손과 발로 개간하였다. 손으로 고랑을 파 물을 끌어와 농사를 지었고, 이 과정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살지 않는 곳을 겨우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을 만든 고려인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개간을 거듭하여 거친 땅을 벼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름진 땅으로 만들었다. 그 과정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련 붕괴와 함께 사정은 달라졌다. 우즈베키스탄의 경제 발전이 부진한 틈에 1천500여 명이던 농장의 고려인 중 상당수가 도시의 공사장으로 떠난 것이다. 이렇게 도시로 떠났던 고려인들의 삶도 쉽지 않았다. 결국 돈을 벌러 한국으로 재이주를 하게 되지만 딱히 기술도 없고 나이도 많은 사람의 경우 한국 사람들이 하려고 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된다. 병원 간병일은 식사와 잠자리가 제공되어 거처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이들에게는 그나마 좋은 일거리에 해당한다.
자기 몸뚱이 반만 한 크기의 가방 하나를 짊어지고 돌아온 사람이 고국에서 이방인이 되어 눕는다. 선대가 저 먼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이라는 땅까지 가는 동안 거친 잠을 많이 자서 저 이도 이렇게 낯선 곳에서 폭 좁은 간이침대에 웃옷 하나 덮고 눕는 것을 힘들어하지 않는 것일까. 운이 좋았으면 부모를 잘 만났으면 조국을 잘 만났으면 우즈베키스탄, 더 멀리 우크라이나까지 멀리 흩어지지 않고 이 땅에서 먹고 자고 살았을 사람이 쪼그리고 누워있다.
호구지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났던 많은 사람이 조상의 땅에 호구지책을 위해 다시 돌아와, 조선족이라든지 고려인이라는 외국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특수 대명사로 불리면서 살고 있다. 봄밤 비는 내리고 민들레 노란 꽃은 지고 우즈베키스탄에서 일곱 시간 비행기를 타고 온 사내는 비에 젖은 민들레 씨앗처럼 날지 못하고 간이침대에 웅크려 잠을 청했다.
<연합뉴스 고려인 강제 이주 70년 기사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