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주인의 애정을 감지한다는데.
자립을 한 뒤 편집장님께 얼떨결에 화분 하나를 선물 받았었다. 집들이 선물이라며. 편집부에 산더미처럼 쌓인 선물을 처분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조그만 생명체를 보살펴본 적 없는 내게는 무게가 컸다. 엄마가 열 달 동안 몸에 지니고 있다 갓 낳은 핏덩이를 받아 든 아빠의 심정이 그럴까? 그 무렵에 나는 반복해서 꿈을 꾸었다. 내가 키우는 토끼 혹은 고양이 같은 작은 생명체가 내 부주의로 신발장에 갇혀, 냉장고에 갇혀 죽거나 밥을 주지 않아 아사하는 꿈.
그동안 분갈이도 세 번이나 했고, 영양제도 주고, 통풍과 볕에 신경 써줬다. 우울해서 하루종일 누워 있더라도 잎사귀가 바닥을 향해 늘어지기 시작하면 벌떡 일어나 물을 주었다. 어느새 한아름이 된 화분을 들고 분갈이를 하러 집 근처 꽃집에 찾아갔을 때, 사장님이 보자마자 “상태가 너무 좋은데요?”라고 했던 그 화분이 호프 셀렘이 아니라 자나두인 걸 최근에 알았다. 잎이 자꾸 시들어서 식물 케어 전문 앱을 다운 받아 스캔했더니 잎 모양이 호프 셀렘이 아니라 필로덴드론 제나두에 가까웠다. 어지럽고 산만한 우리 집 가운데에 점점 키 높은 잎사귀를 펼치는 화분을 보고 있으면 어느 양지바른 땅에 옮겨 심어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는데, 몇 번 부주의로 줄기를 부러뜨리고 물 주기를 게을리했더니 하엽지는 잎사귀가 늘었다. 요즘은 새 잎도 나지 않는다.
주변에 다수의 식물을 키우는 친구들이 있다. 내 글에 매주 꼬박꼬박 그림을 그려주는 친구 로빈도 베란다에 식물을 가득 키우고 있다. 로빈은 개도 한 명 키운다. 많은 생명의 보호자로서 살고 있다. 그런 로빈이 최근 들어 식물이 너무 많이 죽었다며 울적해했다. 마치 자신의 우울한 상태를 대변하는 것 같지 않냐며, 누렇게 말라버린 줄기들을 휴대폰 화면 너머로 보여주었다. 그때 내 화분을 떠올렸다. 여러 일들 사이에 치여서 오도 가도 못하며, 벌린 일은 많은 채 정리가 하나도 되지 않은 내 집에서 오도카니 늘 나를 기다릴 내 식물. 젖은 수건으로 정성스레 잎을 닦아주기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은 지 오래됐다.
내 식물이 자꾸 시드는 게 혹시 화분을 바꾼 탓일까? 두어 달 전쯤 집안 인테리어를 한답시고 회색 직사각형 시멘트 화분으로 분갈이를 했다. 단단한 흙을 파내고 털어 꽉 차 있는 건강한 줄기를 발견하고 감격스러운 마음도 잠시, 화분은 그 이후로 하나의 작은 잎을 틔웠을 뿐이다. 그 마저도 또 내가 부러뜨려서 얼마 자라지 못했다. 네모난 공간 안에 갇혀 있는 식물이 직사각의 원룸에 갇혀 있는 내 모습 같았다. 집 안이 감옥 같다고 느낀 지 오래됐다. 방범창도, 모기장도, 시끄럽게 돌아가는 실외기도 다 싫었다. 분재를 기르기 위해서는 화분 크기에 맞춰 성장 속도를 조절할 정도로 물을 조금씩만 주어야 한다고 어느 친구가 말해준 적 있다. 마치 집에서 ‘애완견’으로 길러지기 위해 품종이 개량된 개들처럼 말이다. 식물은 들판이 그립지 않을까? 숲으로 가야 어울리는 것 아닐까? ‘공기정화에 좋은 식물’ 혹은 ‘반려식물’이라는 말이 잔인하게만 들렸다.
하와이로 출장을 갔을 때, 카카오 농장을 방문한 적 있다. 숲 한가운데 대문이 있었다. 대문을 열자 카카오나무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기능을 하는 식물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었다. 님 나무는 방충해를 미리 감지하고 막는 역할을 하고, 패닉스(panex)는 위로 곧고 튼튼하게 자라는 나무로 거센 바람을 막아준다. 카카오 꽃은 아주아주 작은 파리를 통해서만 수분 가능하기 때문에 바람을 막아줘야 한다고. 바나나나무에서 나는 잎사귀는 카카오 열매를 발효할 때 사용하며, ‘마더 오브 카카오’라는 별칭을 가진 그릴리씨디아 나무는 카카오가 땅 속에서 다량으로 흡수한 질소를 땅으로 돌려보내 토양 황폐화를 막는다. 내추럴 와인을 150종 가량 보유하고 있는 단골 와인 바 사장님은 “내추럴 와인을 만드는 생산자들의 포도밭에 가도 비슷한 풍경을 만나요. 레드품종을 기르는 밭에는 빨간 장미, 화이트 품종을 기르는 밭에는 흰 장미를 함께 심어 병충해를 미리 감지하죠.” 와인은 결국 땅에서 나는 것이라서 그런지 사장님은 떼루아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자랑했다. “숲이나 산의 식물들은 무수히 많은 신경계로 서로 연결돼 있어요. 서로 소통하죠. 산 하나가 하나의 나무와 같아요. 그 사이로 도로를 내면 그 소통의 경계가 끊어지는 거예요.”
원룸에 사는 나는 가끔 외롭다. 내 감정의 줄기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향하고 있음에도. 가끔은 우주의 기운과 내가 연결돼 있다는 느낌도 든다. 눈을 감으면 아주아주 멀리까지 내가 뉴런이 되어 펼쳐나가는 상상. 막연하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손사래 치면 잡힐 듯 가까이서 아른거린다. 무한한 트랑스, 트랑스, 트랑스. 내가 아닌 다른 것들이 되는 경험. 그렇지만 내 집에 바퀴벌레가 있는 건 싫다. 내 식물이 들판에 있다면 공생했을 수많은 벌레들도 내 집에 있는 건 싫다. 인체에 무해하다는 벌레약을 주기적으로 뿌려준다. 친구 로빈은 여자와 식물과 거울을 그리길 좋아한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에 때로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사라진다. 가끔은 분재 속에 틀어박힌 가느다란 줄기가 겹쳐진다. 나는 내내 네모진 방 안에 갇혀 있다. 나는 잘 자라고 있는 걸까? 시멘트로 만들어진 네모난 공간 안에서 내 식물은 잘 자라고 있는 게 맞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