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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므 레터 Jul 15. 2023

미니멀리즘을 추구하십니까?

버릴까, 말까? 버린다, 버리지 않는다. 버리자, 버리지 말자.

처음 혼자 살게 됐을 땐 미니멀리즘을 동경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집 안에 미드센트리 모던 의자와 조명, 작은 베드사이드 테이블 하나 정도만 두고 살고 싶었다. 이사한 지 한 달 됐을 무렵 임스 체어를 사고, 두 달째에 독일 빈티지 조명을 샀다. 집이 좁아 보이는 게 싫어 침대는 사지 않았다. 용달 견적을 내 보니 짐이 생각보다 없다고 사장님이 놀라셨다. 이사는 가족들이 모여서 해치웠다. 바닥에 요를 깔고 누워 휑한 집 천장을 바라보곤 했다. 6평짜리 방에 짐을 줄인다고 여백의 미라는 게 생기지는 않았다. 그냥 멋없고 휑한 원룸일 뿐이었다. 여백의 미는 여백이 있어야, 그러니까 공간이 넓어야 생기는 거였다.


옷을 한아름씩 갖다 버리고, 안 쓰는 가방을 죄다 팔아도 똑같았다. 나는 옷장 깊숙이 박힌 잡동사니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외할머니 옷장에서 털어온 조그마한 시퀸 크로스백. 한 번 들고 나갔다가 끈 한쪽이 끊어져서 그 뒤로 쓰지 못했다. 버릴까? 그럴 순 없었다. 할머니 유품이 될 수도 있잖아. 30년 가까이 입어서 끈이 다 해진 엄마의 잠옷도 마찬가지였다. 무심코 버렸다가 나중에 버린 걸 후회한 옷도 꽤 있었다. 신 포도 우화처럼, 이 넓은 땅에 우리 삶을 매일 한 뙈기가 없어서 미니멀리즘을 강요받는 게 싫어졌다. 차라리 예쁜 쓰레기들을 그러모은 채 살고 싶었다. 그 옷들을 다 버리고 나면 내게 남는 건 뭐란 말인가? 카드값이 급해서 할머니 집에서 가져온 금반지도 팔았는데, 아무래도 어리석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녹여서 다른 반지를 만들더라도 집에 모셔두고 있어야 했다. 그것들은 나랑 너무 오래 있었다.



직장을 그만둘 무렵, 모든 것에 싫증이 났다. 그때뿐인 감정이라 하기도 뭐 하다. 늘 해마다 새로운 옷을 사곤 했다. 작년에 입던 옷이 질려서, 스타일이 바뀌어서, 똑같은 옷을 입은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볼 때 성에 차지 않아서. 직장을 그만둘 무렵에는 오래전부터 구제 시장에서 긁어모은 옷들이 꼴 보기 싫어졌다. 번듯한 매거진에 다니게 되면 번듯한 디자이너 이름이 박힌 옷을 입고 다니게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뒤늦게 구제 명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텅 빈 옷장이 다시 차곡차곡 쌓여서 거실에 새로 둔 행거가 휘청거릴 정도가 됐다.


내 집이 복닥거리는 이유는 단 하나, 옷 때문이었다. 내가 이름 지은 빈티지 의류 사업을 시작하면서 집에 옷산이 다섯 배는 늘었다. 플리마켓이 끝나고 숍에 미처 갖다 두지 못한 옷들이 공간의 5분의 1을 차지했다. 옷 사이를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생활하고 있다. 그 옷 중에는 내가 몰래 가지고 싶은 옷도 많다. 내가 입고 싶지 않으면 떼어 오지 않았을 물건이니까. 구제 의류 사업을 한다는 거, 플리마켓을 한다는 건 쓰레기를 재활용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누가 뭐래도 사실은 그렇다. 남들이 버린 옷을 주워다 입는 거다. 다르게 말하면 남들이 버린 것을 입양해 내 꺼로 만드는 일이다. 언젠가 이 원고 시리즈에 그런 말을 쓴 적이 있다. 우리는 돈 주고 사면 온전히 소유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우리는 사는 기쁨에 묻혀 가꾸는 기쁨을 잃어버렸다고. 나는 쓰레기를 가꿔 새로이 소유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버려진 것들을 가다듬어 새 주인을 찾아주는 일. 때로는 입지 않을 것 같은 옷을 사는 것도 그래서다. 내가 좋은 주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혹은 그 가치를 알아줄 사람이 혹시 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오만한 마음에. 버려진 물건들은 두 부류다. 그냥 버려져 어디에선가 인류가 멸망한 뒤에도 한참 동안 썩거나, 새로운 주인을 찾아 그 수명을 연장하거나. 버려진 물건에 대한 기억은 두 부류다. 미아가 된 채로 우주를 떠돌거나, 새 주인을 만나 새로운 시간을 이어가거나. 나는 어쩌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그 역사에 참여하고 싶다.


메르켈 총리나 고 스티브 잡스처럼 나만의 스타일을 찾아 엇비슷한 옷을 주르륵 걸어놓고 사는 삶도 생각해 봤다. 일주일치 빨래를 하면 입을 옷이 생기는 간단한 삶. 그게 내 분수에 맞는 일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커버그가 아니잖아. 내가 미니멀리즘으로 산다고 해서 기억해 줄 사람이 있을까? 나를 한 번 본 사람들은 나를 다 기억하고 있을까? 나를 같은 사람으로 인지하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그때마다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장난꾸러기가 된다. 오늘은 돈을 상징하는 금붕어가 그려진 하와이안 티셔츠, 어느 날은 오리지널 퍼티그를 복각해 만든 스커트, 어느 날은 시장에서 사 입은 샤 스커트에 누덕누덕한 런닝, 또 어느 날은 당근에서 산 유명 SPA 브랜드의 깔끔한 셔츠, 또 다른 날은 호피무늬가 짙은 드레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나의 이미지를 기억하면 좋겠다. 그 이미지를 다 내 역사로 만들고 싶다. 옷장을 열면 같은 사람의 것인지 모를 정도로 복잡다단한 스타일이 섞여 있는, 맥시멀리스트가 되고 싶다. 옷 입는 규칙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아무거나 믹스매치하는 사람으로 오래도록 살 것이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여기저기서 사모은 골동품을 거실에 진열해 놓고 사는 전 직장 선배처럼, 다 그러모으고 살 것이다. 도저히 한눈에 취향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띄엄띄엄 보면 전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을 정도로. 이미 오래전에 백지 같은 사람이 되기는 글렀다. 이 글을 꾸준히 읽어주는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아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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