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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원 Sep 15. 2021

序. 시간을 거슬러

<화산지연리>




짹짹- 짹짹- 


별이 가까워졌을 즈음.

감은 눈 사이로 뜻밖의 빛이 점점 더 강하게 부서져 들어왔다. 어둠의 틈새를 파고든 그 강렬하고도 뜨거운 온기가 이윽고 무영의 뺨을 날렵하게 후려쳤다.


찰싹!


아팠다. 

뜻밖에 치민 얼얼하고도 묵직한 통증이 무영의 얼굴을 타고 내가 살아 있다고 외쳤다. 그는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시야를 가득 메운 어둠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무영은 숲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 눈앞에 선 사람은, 다름 아닌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추억 속의 한 사람을 닮았다.


“십오 사제, 너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냐? 스승님과 사형들께서 다들 얼마나 찾으셨는지 알아!”


“시… 십사 사형?”


화산의 열네 번째 제자, 무영에게는 십사 사형이 되는 무천. 

무영의 눈앞에서 미간을 구기고서 잔소리를 퍼붓는 사람은, 놀랍게도 그였다.


“그래, 나다 인마!”


“대, 대체 사형이 어떻게? 사형은, 분명히 옛날에 죽었-”


눈앞에 나타난 기막힌 허깨비에 무영은 적잖게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십사 사형은 이미 옛날 옛적에 불귀의 객이 된 자였기 때문이다.


“엥, 십오 사제, 너 대체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나 무영에게 펼쳐진 기묘한 일상은, 결코 이뿐만이 아니었다.


“십오 사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평소라도 감히 함부로 상상한 적 없는 괴기스러운 상황이다. 그 현상이 눈앞을 가득 메운 탓에 절로 겁이 났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내가 죽은 게 아니고서야 일어날 리가 없는 사건이다.


너무다 믿기 힘든 십사 사형 무천의 생환.

무영은 기가 죽었다.


“… 말도 안 돼.”


게다가 저 십사 사형의 외양 또한 참으로 당황스럽다. 흡사 지금 자신이 아주 옛날로 돌아오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정말, 무천이 형…?”


무영은 사부 매화검선 아래 열네 사형과 함께 화산에서 동고동락하며 지내던 시절을 떠올렸다. 마주 노려보고 있는 십사 사형은 그만큼 너무나 앳된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으이구, 이 자식아! 대체 언제까지 멍하니 앉아 있을 속셈이야?”


그러나 무영의 쓰린 속내를 알 턱이 없는 십사 사형은 그가 이상하다는 듯 짜증을 벌컥 냈다. 하지만 그 역시 기가 막혀 한숨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심했지만,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무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 말도 안 돼!’


바로 그때, 완전히 줄어든 자신의 조그만 고사리손이 시야에 보였다. 놀란 무영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또한 깨달았다. 마주 선 십사 사형만큼이나 자신도 어려졌다는 사실을.


“아….”


충격에 빠진 무영은 그만 말을 잃었다.


‘여긴 분명, 지난 수십 년 간 그리던 태화산의 땅이다.’


그는 다시 막 자각한 상황이었다. 지금 제 주변에 자리한 이 무성한 수풀 역시… 자신이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곳이라는 사실도.


“십오 사제 이 놈아, 그러니까 어서 사부 계신 본당으로 돌아가자. 예서 콕 박혀 딴청을 피운다 해서 해결될 문제가 절대 아닌 게야!”


“십사 사형… 아니, 무천이 형.”


십사 사형은 여전했다. 빛바랜 추억 속의 얼굴과 꼭 같은 모습을 하고서, 십사 사형은 또 그때 그 시절과 똑같은 잔소리로 무영을 타박했다.


‘그래, 나는 회귀했다.’


이를 새삼 다시 자각한 순간, 괴이하게도 또 눈물이 났다. 


“하하….”


이로써 종래 맺은 모든 인연이 다시 수십 년 전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솔직히 허탈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안심도 됐다. 참 오랜만에 재회한 반가운 가족이 지금 눈앞에 있었기에.


무영은 울었다.

참담한 죽음에서 다시 생환했다는 감격에 겨울 틈도 없었다.


“… 나는, 대체 왜.”


허탈함은 이내 무영의 심중에 가득 들어찼다. 동시에 감출 길 없는 맑은 울음이 얇은 물줄기를 그리며 소년의 통통한 복숭앗빛 뺨을 타고 흘렀다.


“뭐야? 십오 사제, 야, 너 갑자기 또 왜 그래?”


우는 무영이 퍽 이상하게 보인 걸까. 십사 사형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냐, 왜 뜬금없이 훌쩍이고 있어?”

“무천이 형….”


분명했다. 저 모습, 애늙은이인 양 짐짓 점잔 빼는 말투며 모든 것이 기억 속의 십사 사형 무천과 똑같다. 생각지도 못한 재회에 이젠 기가 찰 지경이다.


‘그렇지만….’


또한 반가웠다. 십사 사형을 다시 만나서 솔직히 너무 기뻤다. 


그러면서도 가슴이 저릿하고,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이 마음. 이걸 대관절 어떻게 십사 사형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형, 이거… 진짜 꿈 아니지?”


그러니까 되물었다. 기가 막힌 이 상황이 영 허깨비인지 아닌지, 스스로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최대한 침착한 척, 쓴웃음도 애써 감췄다.


“꿈… 정말 아닌 거지?”


“뭐?”


십사 사형의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족히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만 물씬. 그러나 그러한 상대가 혹 눈앞에서 사라질까 무영은 두려웠다. 그래서 꽉 붙들고서 재차 외친다.


“무천이 형, 아니 십사 사형… 진짜 살아 있는 거 맞지!”


고심하면서도 또한 걱정했다.

혹시나 눈앞에 선 사람이 신기루일까 두려웠다. 근데 십사 사형은 그저 미간을 구기며 나직하게 혼잣말로 투덜거릴 뿐이다. 누가 봐도 전형적인 그 옛날, 손윗사형 무천의 모습이다.


“아니…… 십오 사제 이놈의 자식, 지금 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게야?”


그 순간, 무영은 직감했다.

이 상황이 절대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진짜, 십사 사형!”


무영은 활짝 웃으며 상대의 목에 매달렸다. 이 뜬금없는 애정 공세에 당황했는지 십사 사형이  질색팔색을 했다. 하지만 저 얼굴을 이렇게 다시 만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뻤다.


‘어제의 전장이 이렇게나 시야에 생생한데….’


동시에 그의 머릿속을 잠식하는 것은, 역시 한 줄기 아련한 그리움이다.




'내 아내....'


일런(愛伦).  그녀는, 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속절없는 지옥, 그 전란 속에서 바람대로 무사히 탈출했을까?


'런....'


무영은 나직이 아내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걱정에 다시 사로잡힌 순간, 시야에 그때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아, 바람이 분다.’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성 누각에 높이 솟은 시실리 왕국의 깃발이 덩달아 무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흡사 지옥을 향해 치닫는 이 나라의 비극을 하늘에 널리 고변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날의 전장은, 역시 결코 잊을 수 없다.’


보이는 폐허와 황량한 벌판도 모두, 시실리 섬의 풍경이다. 고향 땅인 중원을 떠나 당도한 아내의 나라, 바로 그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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