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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김세원 Sep 15. 2021

第 1 章. 떠날 수 없었던 이유 (1)

<화산지연리>




‘그리고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참 기막힌 상황에 봉착해 있었다. 그는 이 땅에 아내 일런의 남편으로서 왔다. 단 한 번도 꿈꾸지 못했던 색목인들의 세계에 중원인으로서 처음으로 발을 들였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허상도, 다름 아닌 아내의 그림자였다.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아내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는 단순한 이유로 지독한 불면증까지 얻은 그다. 가슴 깊이 간직한 그리움은 여전히 절절하지만, 갈 길이 막혔다.


‘전쟁,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말 그대로, 일생일대의 마지막 승부가 기다리고 있다.

그날이 곧 온다. 무영(武影)은 쓰게 웃었다.


아내의 나라, 그녀의 고향.

이 섬과 푸른 바다는 그런 의미에서 무영에게도 참 각별한 터전이었다. 


이곳에 터를 내리고 꼬박 이십 년을 살았으니 그에겐 제2의 고향이라 해도 무방했다. 


집에 있을 때는 가끔씩 아내와 함께 성을 나와 바레모(巴勒莫)의 해안을 거닐었다. 유쾌한 추억이었다. 연인의 손길만큼이나 보드라운 해변의 모래는 햇빛을 받아 하얗게 부서졌다. 그 위로 벽옥, 마노 등등 층층이 다른 보석의 색채를 실은 지중해가 느리게 흘렀다. 


난생 처음 보는 진기한 광경이었고, 눈도 즐거웠다. 두 사람이 나눈 추억 가운데 십 년은 저 지중해와 닿아 있다고 봐도 좋았다. 그래서 바다를 보면 무영은 아내 생각을 늘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지키고 싶었다.

아무도 그 뜻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더라도.


때는 가을, 구원군은 폭풍을 만나 섬 부근의 해협에서 전멸했다.

응원군이 오기를 더 기다리는 것도 무의미한 전략이었다. 이곳에 더 올 병사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이제 백 명이 되지 않는 군사로 저 무자비한 노르만 군대를 맞아 싸워야 한다. 


무영은 그마저 반을 나눴다. 성 안의 부상자와 노약자를 수도인 바레모로 호송하게끔 제 종자에게 병사를 내준 것이다. 이것으로 그에게 남은 병력은 채 오십도 되지 않았다.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며, 무영은 검자루에 붕대를 고쳐 감았다. 감고 또 감아서 아예 제 손에서 떨어지지 않게 봉했다. 그렇게 단단히 옭아매고 나서야 그는 성문을 나섰다.


“와아아아!”


달려드는 적병의 형상이 시야를 까맣게 메웠다. 언뜻 울려 퍼지는 우렁찬 말발굽 소리로 보아 한눈에도 상당한 군세였다. 반대측 선두에 선 무영은 손에 쥔 검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노르만 군사는 보병도 기병도 모두 몸에 철갑옷을 두르고 있다고 했다. 웬만한 창검으로는 생채기조차 낼 수 없는 강철. 바로 그 노르만 부대가 이제 코앞까지 밀려왔다.


“후우….”


무영은 나직히 숨을 골랐다. 제 수중의 병력은 겨우 오십 명이 채 되지 않는다. 

기병은 전무하고 보급도 충분하지 않았다. 


주어진 모든 조건이 열악했다. 

성을 지키던 병력 대부분도 선발전에서 이미 전부 궤멸했다.


‘어쨌든 이겨야 한다. 살아서 런을 다시 만나기 위해선, 반드시!’


이 가닥조차 잡히지 않는 패배를 예견하는 것만으로도 기가 막혔다. 그렇지만 결코 티를 내지 않고서, 무영은 눈앞의 뿌연 모래구름을 말없이 응시했다.


‘놈들은 기병으로 우리의 전열을 훑어버릴 것이다.’


머릿속에 언뜻 흐르는 생각마저 두려움만 가득하다.

어쨌든 그는 오십 명도 넘지 않는 보병 소대만으로 저 잔혹한 적에 대적해야 했다. 펼칠 수 있는 전술도 모든 조건이 제한적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버텨야만 한다. 

이곳이 뚫리면 그 다음은 아내가 있는 바레모 성의 차례가 된다. 


‘반드시, 놈들을 여기서 막아낼 것이다.’


피할 길은 없었다. 살아남을 확률도 희박했지만, 그 도박에 그는 목숨을 걸기로 했다. 지휘관으로서 겁을 집어먹을 순 없다. 무영은 매서운 눈빛으로 적이 몰려드는 정면을 응시했다.


“전군, 진격하라!”


단 오십 명의 보병으로 적의 기병이 도약할 일말의 틈조차 허락하지 않을 셈이다. 무영은 병사를 2줄로 길게 늘어선 채 빠르게 진격했다. 일자진이었다.


“와아아아!”


“신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리라!”


사기충천한 병사들이 그의 뒤를 따라 맹렬하게 전장을 향해 진격했다.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달릴 때마다 죽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길쭉한 나무 창을 앞으로 쭉 내밀고서 거칠게 쇄도하는 적병을 온몸으로 맞아 분투하며, 무영은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낙매분분(落梅紛紛)!”


그가 검을 한 번 크게 휘두르자, 달려들던 적 선발대의 나무 창이 힘없이 부러졌다. 


하나, 둘 그리고 셋. 

오랫동안 그리던 고향, 중원의 골짜기라도 휘젓듯, 무영은 한층 더 경쾌하게 검영을 뿌렸다. 그 모습은 흡사 어느 이른 봄날,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산골짜기를 떠올리게 하듯 이채로웠다.


“와아아!”


덩달아 사기충천한 병사들이 무영의 뒤를 따라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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