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지연리>
“주인 나으리, 큰일났습니다!”
마지막 전쟁이 시작되기 하루 전, 무영은 막사에 있었다.
“주인 나으리!”
그는 불현듯 들리는 익숙한 중원어에 고개를 들었다.
이건 자신의 통역 겸 호위로 따라온 하인 사나의 목소리다.
장수들의 노여움을 사 전술 회의에서 추방당한 무영이 진중 막사에 갇혀 대기한 지 채 이틀도 지나지 않은 때. 허나 돌아가는 상황이 급박한 건 그도 느낄 수 있었다.
“사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지금 바깥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게, 그것이···.”
침착한 그를 두려움 가득한 푸른 벽안으로 응시하며, 빨간 머리 하인 사나가 말했다.
“선발대가 패퇴했습니다. 노르만 놈들이 지금 성으로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습니다!”
“······.”
충격에 빠진 무영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전황은 그의 끔찍한 예측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굳이 생각지 않아도 앞으로의 상황은 더욱 비참할 게 뻔했다.
이대로 몰려드는 적병을 막지 못하면 모든 일상이 끝난다.
노르만 부대는 끝끝내 아내가 있는 수도까지 진군해 모조리 짓밟을 것이다.
“나으리, 대체 이를 어떡하면 좋단 말입니까?”
상상만으로도 감히 용납할 수 없는 결말이었다.
그래서 그는 눈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하인 사나를 향해 소리를 높였다.
“사나, 현재 성에 남아 있는 병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채 이백 명도 되지 않습니다요. 그마저도 반 이상이 부상자들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빨간 머리 하인이 눈물로 고한 병력의 수는 당장 성을 지키기에도 빠듯했다. 게다가 그는 이 병사로 성안 마을 사람의 안전도 보장해야 한다. 다급해진 무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떻게든 여기서 시간을 벌어야 해.”
고민은 짧았다. 내려야 할 선택은 더없이 분명했다.
적병의 진격을 여기 세라미 성에서 기필코 저지해야 한다. 하다못해 놈들의 이동만이라도 최대한 늦춰야 한다.
아내와 바레모 사람들이 대비할 수 있도록, 이 성의 무고한 목숨이 모두 안전한 곳으로 대피할 수 있도록. 자신은 반드시 여기 남아야만 했다.
‘설령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없을지라도….’
결단을 내린 무영은 빠르게 제 검을 꺼내 쥐었다. 저 멀리 중원 태화산의 제자로 몸담고 있을 때부터 고이 간직한, 후기지수의 보검이다.
“주인 나으리,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런 무영의 앞을 다급하게 가로막으며, 하인 사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나가면 죽음뿐입니다. 마님을 생각하십시오! 곧 태어날 아기씨도, 모두 주인 나으리가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 나는 가야만 합니다.”
“다시 돌아간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마님과의 약속을 어기실 셈입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남아서 여길 지켜야 합니다. 사나, 바레모로 가요. 가서 런에게 빨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파사국(波斯國)으로 도망가라고 전해. 어서!”
거칠게 언성을 높이는 무영의 앞을 가로막으며, 빨간 머리 하인 사나가 외쳤다.
“안 됩니다! 나으리께서는 호송 부대와 함께 퇴각하십시오.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노예가 나아가 놈들을 막겠습니다. 주인 나으리, 마님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러니 제발!”
“이랴!”
말리는 종자의 손에서 말고삐를 빼앗아 쥐고서, 무영은 그대로 달렸다.
“나으리!”
뇌리에서 하인 사나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폐부 깊숙이 몰려드는 고통과 더불어 점점 흐려지는 시야, 무영은 힘없이 눈을 떴다.
"아...."
그는 폐허에 있었다.
참담한 패잔병의 모습을 하고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넘어진 시체 무리 틈에 홀로.
“크윽….”
생존 사흘째, 눈꺼풀을 드는 일조차 이젠 버거웠다.
“아···.”
그 이후 다시 사흘이 더 흘렀다.
꼬박 나흘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셈이다. 뱃고동 소리는 이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울렸다. 기막히게도 졸린 가운데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무영은 쓰게 웃었다.
“하! 하···.”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도 꼴에 인간이라고 먹을 것부터 찾는 자신이 무영은 너무나 서글펐다.
까악, 까악.
어디선가 문득 까마귀 소리가 들렸다. 놈은 필경 제 밥 먹을 자리를 찾아온 게 틀림없다. 주변에 널려 있는 것이 죽어 나자빠진 살코기였으니.
“젠장.”
무영은 힘을 잃은 제 손을 보았다.
손가락 사이에 덕지덕지 엉겨 붙은 붉은 피가 딱지처럼 앉았다.
까악, 까악.
다시 또 울리는 까마귀 소리. 그것은 흡사 이제 다음은 너를 잡아먹을 것이라고 고하는 듯했다.
‘그렇게 되게 둘까 보냐!’
무영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저를 보고 우악스럽게 괴성을 지르는 까마귀를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점점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아지랑이가 어렴풋이 너울거렸다. 그 모습이 흡사 사랑하는 아내처럼 느껴졌다. 상상만으로도 미쁜 그녀의 형상. 무영은 눈물을 삼켰다.
‘사나가 적병보다 더 빨리 바레모 성에 닿아야 하는데.’
수성전에 돌입하기 전, 그는 통역 겸 호위무사로 따르던 종자 사나를 퇴각 부대와 함께 아내가 있는 수도로 보냈다.
이길 확신조차 없는 때, 그로선 적어도 가족의 안위만이라도 챙겨야 했다.
비록 자신은 그들과 함께 떠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가장의 책무가 아니던가?
무영은 절망에 빠졌다.
‘제발. 도망가, 일런.’
그는 나직하게 숨을 골랐다. 참으로 기막히게도, 이 와중에 떠올린 책략이라는 게소싯적 제 모친이 일러준 옛 조의심법(皁衣心法)이었다.
정말 그것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무영은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노르만 부대가 가기 전에 더 먼 곳으로, 안전한 곳으로 떠나 줘, 부디.’
무영은 퍼석하게 말라붙은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가 입을 적셨다.
그는 고개를 떨궜다.
이 고난이 꼭 악몽처럼 느껴졌다. 저 멀리 일렁이는 아지랑이는, 흡사 성에서 그를 기다릴 아내의 손짓을 닮았다. 달려가고 싶었지만 두 다리는 이미 힘을 잃은 지 오래다.
‘하, 이딴 곳에서 객사(客死)라니.’
어째서일까?
불현듯 아내가 보고 싶었다.
“아이참, 무영.”
감기는 시야 저편에서 어렴풋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꼴이 되고 난 지 꼬박 나흘째가 되어서야, 겨우 듣게 된 그리운 음성이다.
“무영, 이거 봐요.”
옥구슬이 구르는 듯 곱고 이채로운 그 목소리.
비록 신기루였지만 퍽 듣기 좋았다. 무영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잔인한 이 땅이 자신에게 보낸 허상이라는 것을. 그러나 머릿속에 번지는 그녀의 목소리가 상상만으로도 황홀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이윽고 꿈속의 아내가 말했다.
“···우리 아이, 이제 곧 열 달이래요.”
무영은 답하지 못했다. 사실, 그건 그가 폐허에서 홀로 분투하는 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꼭, 돌아올 거죠?”
출정할 때가 꼬박 아홉 번째 달이었으니, 아마도 아내는 지금쯤 아이를 낳았을 것이다.
딸일까 아니면 아들일까.
아이는 어떻게 생겼을까?
아이는, 또 아내와 자신 중에 누굴 더 닮았을까.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에 덕지덕지 상념이 밀려들었다.
그건 결코 이 생에서 답조차 알 수 없을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무영은 말없이 눈물만을 쏟았다.
‘미안해… 런. 나를 절대 용서하지 마.’
비참했다. 어쨌든 자신은 출산하는 아내의 곁조차 지켜주지 못했다. 남들은 다 한다는 그 사소한 일조차도, 끝끝내 해주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자신은, 영영 그녀와 아이의 곁을 떠나려 하고 있다. 다신 돌아올 길 없는 수렁 속으로, 먼지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참담한 현실을 직감한 순간, 차오르는 눈물이 무영의 입부터 막았다.
“아···.”
사랑하는 아내는, 여전히 아리따운 모습으로 무영의 곁에 서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무영을 향해 싱긋 웃었다. 그 모습이, 흡사 바로 오늘 마주한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결국,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기쁨은 이내 절망이 되었다. 폐부를 깊게 관통한 고통은, 그 달콤한 꿈속에서조차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무영, 꼭 돌아와야 해요.”
아내는 눈앞에 있었지만, 감히 만져볼 수도 안아줄 수도 없었다. 꿈을 꿀 때조차 자신은 비참한 패잔병의 모습이었다. 이대로는 달콤한 사랑의 밀어조차 나눌 수 없는, 시체로 변할 뿐.
“계속 기다릴 테니까. 약속해요,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
“앗살람 알레이쿰(신의 축복을).”
무영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말라붙은 목구멍 사이로 이제 더는 어떠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소리조차 낼 수 없는 혹독한 전장, 그곳에서 무영은 침묵으로 목놓아 외쳤다.
그녀가 곁에 없는 삶 따위, 역시 꿈꾸고 싶지 않다고.
그 여인의 곁에 자신이 아닌 다른 놈이 서 있는 인생도, 역시 두 눈 뜨고서 결코 목격하고 싶지 않다고.
내 가족을, 그러니까 제발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죽고 싶지 않··· 아.’
무영은 고개를 들었다. 말라붙은 입으로 뻐끔뻐끔 살고 싶다고 울부짖었다. 대답조차 없는 하늘에 다시 어둠이 내리고 또 해가 떠오를 때까지.
쿵.
그 나흘째 되던 어느 날,
한때 화산파의 촉망받는 후기지수였던 사내, 연무영은 비참하게 죽었다.
‘런.’
움직여지지도 않는 손가락을 들어, 힘겹게 쓴 몇 마디 글귀를 세상에 남기고.
‘꼭, 다시 돌아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