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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는 어떻게 삶이 되는가?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칼럼「두툼한 슬픔」을 읽고



텔레비전에서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스마트폰 시대에 텔레비전을 보는 일은 고전적으로 느껴진다. 웃음도 슬픔도 텔레비전을 통해 처음 배웠기 때문일까. 나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말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편이었다. 재난이 발생하면 텔레비전을 먼저 켠다. 속보를 확인하고 여러 단계 책임자의 신중한 발표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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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을 통해 말이 전파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공식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슬픔과 아픔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무엇일까. 기준을 두께로 잡는다면 얼마나 두툼해야만 하는 것일까. 지난 몇 주간 나는 이 기준에 큰 혼란을 느껴야만 했다. 초박형 모니터처럼 얇은 말들이 비극의 현장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왔다. 누구보다 책임을 느껴야 할 어른들은 초경량의 언어를 선보였다. 언어의 무게를 달아 책임을 지울까봐 달아나는 도망자들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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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학자인 앤 카슨에게는 오빠가 있었고 그는 타지를 떠돌다가 세상을 떠났다. 앤 카슨은 오빠를 애도하며 <녹스>라는 책을 만들었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옆으로 붙여서, 더 이어지기를 바라는 생명처럼 길게 펼쳐지도록 만든 이 책의 왼쪽에는 카툴루스의 슬픈 시를 번역하는 과정이 있고 오른쪽에는 단상과 기억을 적은 글, 유품의 조각 등이 실려 있다. ‘녹스’는 라틴어로 ‘밤’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앤 카슨을 휘감았던 눈물의 밤을 읽는다. 독자는 함께 슬퍼하고 그의 손처럼 책을 붙잡고 새벽으로 걷는다.
이 책은 앤 카슨의 애통함처럼 두툼하고 무겁다. 192쪽이지만 손으로 풀칠해서 제본했기 때문에 거듭 접힌 면이 두께를 만든다. 표지에는 수영복을 입고 물안경을 쓴, 어린 오빠의 사진이 있다. 첫 문장에서 앤 카슨은 “나는 나의 비가를 온갖 빛으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그러나 죽음으로 우리는 인색해진다. 그것에는 더 이상 허비할 게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는 죽었어. 사랑도 이를 어찌할 수가 없다”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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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껍게 슬퍼해야 한다. 두툼하게 말해야 한다. 어린이처럼 무겁게 애도해야 한다. 인색함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해버리지 않도록 공동체의 기억으로 남겨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감각이다.

경향신문, 오피니언,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두툼한 슬픔」中 


모든 것에는 이면이 존재한다. 어딘가에 발전이 있으면 어딘가에는 퇴보가 있기 마련이다. 이제는 인치 단위로 그 두께가 소개되는 텔레비전을 비롯 한 손으로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텔레비젼 ‘유튜브’ 등을 통해 정보의 비대칭성이 사라진 만큼 누구나 쉽게 여러 정보를 접하고 획득하게 됐다. 그만큼 우리 삶은 쉽게 설명되고 쉽게 소비되며 쉽게 소멸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어떤 이의 죽음은 ‘OO세 노동자 00명 사망’ 혹은 ‘OO세 대학생 혹은 직장인 외 00 사망’ 등으로 스쳐 간다. 이 과정에서 죽은 이들은 말이 없고 오직 그들에 대한 온갖 추측과 비방만이 얇디얇은 텔레비전 안에서, 한 손의 핸드폰에서 난무할 뿐이다. 


나는 한 번의 클릭과 접속이면 어디서든 책을 읽을 수 있는 디지털 시대에 출판 편집자로 살고 있다. 내지와 외지의 질감을 고르고 폰트의 종류와 크기를 정하며 독자의 눈이 좇을 카피를 정한다. 컴퓨터로도 편히 볼 수 있는 원고 덩어리를 굳이 출력해 밑줄 그어가며 읽는 것도, 출퇴근길에 무거운 책을 들고 다니며 읽는 것도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이 사회에서 최소한의 인간적인 감각을 지키기 위함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서점에 가면 팔리지 않는 책들이 수두룩하고, 유튜브가 대세인 사회에서 어떤 마음으로 책을 만들 수 있는 거냐며. 


아날로그는 가장 기본적인 시대 감성이라고 생각한다. 시대가 어느 방식으로, 어떻게 변하든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언젠가는 되돌아오는 마련이다. 그리고 감성이라는 건 가볍게, 편리하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앤 카슨이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며 만든 책 <녹스>의 면 하나 하나가 그녀의 손을 거쳐 마침내 두꺼워진 것처럼, 그래서 오빠의 죽음 앞 그녀의 애통함을 닮을 수 있게 된 것처럼 감성이란 뭐 하나 쉽게 넘어가는 것 없이 일일이, 불편하게, 꾹꾹 눌러 담고 만지는 일에서 만들어진다. 


나는 그러한 책의 힘을 믿기 때문에 앞으로도 책 만드는 사람으로 살 것 같다. 그렇게 내가 지키고 싶은 최소한의 것들을 지키면서. 

그렇게 하다 보면 저자의 말마따나 ‘언어의 무게를 달아 책임을 지울까 봐 달아나는 도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어떤 슬픔 앞에서 나의 생각이 언어화될 때 적어도 아무 생각 없이 타인에게 상처 주는 사람만은 되지 않을 수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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