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까만 Jan 27. 2019

오지 마, 캄보디아는 변했어

다시, 씨엠립

여전히, 캄보디아의 공기는 달달하고 매캐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게스트하우스는 그대로였다. 침대는 넓고 화장실은 낡았으며 레스토랑에는 해가 가득 들었다.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보던 남자애는 우리를 바로 알아보았고, 청소를 하는 두 여자애는 내게 달려와 안기고는 계속 내 허리를 감고 있었다.

우리는 손이 부드러운 장님 마사지사를 찾아 나란히 누워 마사지를 받고 펍스트릿을 찾았다.

펍스트릿에는 여전히 백인들로 가득했고, 끊임없이 한국인 투어버스가 찾아들었다. “툭툭”을 외치는 사람들은 모두 선량하게 웃었고, 옷가게 여자들은 “How much can you pay? I can discount for you”를 외쳤다.

1년 만이었다.


길에서 만나 치킨을 사준 여자애 둘 중 하나를 다시 길에서 만난 건 놀라운 일이었다.

눈이 큰 여자애는 거리 식당에서 손님을 유인하고 있었다. 내가 알아보고 인사하자 여자애는 갸우뚱했는데 머리를 땋아준 이야기를 하자 눈을 크게 뜨고는 친구들을 불러서 빠르게 말을 했다.

여자애는 여전히 예뻤고, 키가 훌쩍 커 있었다.

식당에서 일을 하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이제 10살이 넘었을 법한 아이라 불법이라고 생각했지만 엽서를 파는 일보다는 나을 터였다.


우리는 50센트짜리 맥주를 마시고 잔뜩 쇼핑을 했다.

모든 것이 같았고, 내 옆을 걷고 있는 사람도 같았으나 유일하게 다른 점은 그가 내게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거였다.


내가 인도를 떠나 한국에 돌아온 후 사흘이 지났을 때 패트가 메일을 보내왔다. 한국에 오겠다는 거였다.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고, 그러니 계획을 조금 바꾸어 한국에 한 달 정도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것이 메일의 요지였는데, 그는 벌써 1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는 중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연인이 되었고, 어디에서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캄보디아를 다시 찾은 것이다.

 

많은 것이 변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은 그대로인데 우리는 변했다. 그 실감이 나쁘지 않았고, 나는 패트에게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다시 찾은 캄보디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까만


그리고 우리는 함께 S를 만나러 갔다.

S는 캄보디아의 NGO 학교에서 교사로 있다가 기부금이 학생이 아닌 교사에게 쓰이는 것 교장과 다투고 나와 직접 무료 학교를 지은 캄보디아 청년이었다.

그는 물론 선량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그보다는 야심가였고 조직가였다.

학교 과목으로 영어나 수학 같은 기본 과목 이외에도 종이접기, 배구, 독서와 같은 다양한 과목을 만들었고, 캄보디아 교사로만 학교를 꾸려나가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아이들이 외국인 교사에 대한 흥미를 가지면 현지인 교사에 대한 존경을 잃는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에게 직업의 기회를 제공하는 측면이 더 컸다. 졸업생들 중 우수자를 추려서 후원자를 연결시켜서 대학교에 진학시키는 프로그램 역시 진행 중에 있었다.

같은 NGO 학교에서 만난 호주 여자 친구, R이 그를 돕고 있었다. R은 6개월에 한 번씩 호주 교사들을 자원봉사로 데려 와서 현지인 교사들에게 연수의 기회를 주었다. 그 외에도 호주 안에서 다양한 기부 활동을 홍보하고 조직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패트 역시 호주 내에서 R을 알게 돼 무료 학교를 후원하게 된 경우였다. 무료 학교를 지을 때 패트는 건물을 짓는 것을 도왔고, 학교 내 책상과 의자를 모두 직접 만들었다.


당시 S가 패트에게 심어 준 꿈이 하나 있었다.

캄보디아에서 땅을 사고 게스트하우스를 지어 수익금으로 무료 학교를 돕고 졸업생들을 게스트하우스 직원으로 채용하는 것이었다. 패트는 내게 게스트하우스 옆에 작은 집을 지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사는 것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그건 이내 우리의 꿈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여기 캄보디아에 다시 온 거였다. 우리의 작은 꿈을 하나씩 준비해 나가기 위해.

그러기 위해서는 S에게 이것저것 물을 것이 많았다.

땅을 사는 구체적인 절차, 게스트하우스를 짓는 데 필요한 것들, 우리가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과목이며, 그 외에 생활비를 벌 수 있는 방법 등등.     


우리가 돕고 싶었던 아름다운 무료학교 @까만


S는 우리의 계획에 고개를 저었다.

“Things change.”

캄보디아는 이제 변했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게스트하우스로는 돈을 벌지 못해. 한국에서는 돈을 벌 수 있잖아. 거기에 있어.”

S는 어딘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는 계속 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보통의 캄보디아인들은 한 달에 삼십 달러를 벌어. 생각해 봐. 그 돈으로 뭘 할 수 있겠어? 토스터기 하나도 사지 못해.”

우리는 그래도 어떻게 방법이 없겠냐고 연거푸 물었지만 그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할게. 우리가 외국인 교사를 원하지 않는 걸 알고 있지? 사실 여기서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패트와 나는 실망감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우리가 오랫동안 꿈꾸고 계획해 온 것이 너무나 쉽게 거절당하는 것에 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도, 패트도, 우리 중 누구도 S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S는 오랫동안 가난하게 살았다. 전기도, 수도도 없는 마을에서 살았고 그런 마을의 아이들을 위해 무료 학교를 지었다. 그리고 여전히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었고, 그가 아니었다면 교육의 기회가 없었을 칠백 명의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있었다.

무료 학교에서는 정규과목으로 위생교육을 하고 있었는데 그건 어떻게 얼굴을 씻는지, 어떻게 머리를 감는지, 어떻게 손톱을 자르는지에 대한 거였다. 누구도 그 마을의 아이들에게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들의 부모도 그런 것을 배운 적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아마 S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 S가 돈 이야기를 한다면, 그런 S가 가난이 지겹다고 말을 한다면 우리는 그 어떤 말로도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오지 마. 너희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나는 그의 말이 진실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두 팔을 벌려 환영하면서, 달콤한 미래에 대해 늘어놓았다면, 그 미래가 백 퍼센트의 희망과 긍정으로 이루어졌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하고 싶었다.

그래, 한국에 있으면 돈을 벌 수 있겠지. 캄보디아에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벌 테니까, 그 돈으로 이곳을 도와줄 수도 있을 거야.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거야.

우리가 매일 눈을 뜨는 곳, 걸어 다니는 길,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직접 일구어내는 것들. 그 전의 삶에서 찾을 수 없었던, 그래서 우리를 괴롭게 하고 떠나게 했던, 삶의 의미. 내 손에 움켜쥘 수 있는 삶의 가치.

이 가난한 마을, 머리를 어떻게 감을 줄 모르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이 마을에 그 답이 있을 것만 같았는데,

그건 배부른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소리였을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해?



이전 10화 무장경찰 앞에서의 사랑의 인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