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쓰고 바꾸자
출간 기획서를 토대로 마음속 책 한 권을 꺼내는 첫걸음이다.
앞으로 2주의 시간을 글쓰기에 할애하기로 계획했다.
먼저, 주제와 대강의 줄거리를 토대로 한 편의 글 완성하기.
그다음 주엔 출간 기획 서상 타깃 대상에 맞춰 인칭(화자가 누구인가?) 시점에 따라 수정하거나, 필요시 캐릭터화하는 작업.
마지막으로 전체적으로 문장이 매끄러운지 다듬고, 교정/ 교열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이번 주는 이미 생각해 둔 대강의 스토리를 편하게 일기처럼 혹은 에세이처럼 쭉~ 써보기로 했다. 처음부터 '이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떤 그림이 들어가야 할까?' 그림과 딱 맞춰서 떨어지게 쓰려면 힘들다. 이건 마치 아이디어 회의하자고 불러놓고, 하나 얘기하면 '그건 이래서 안돼~'하고 바로 잘라버리는 것과 같다. 그러니 그냥 주제에 맞게 마음속에 생각했던 내용을 한달음에 써보는 것을 추천했다. 제출기한은 10월 13일 자정까지였다.
미션을 올리고 제출기한일인 13일까지 어느 누구도 단체 대화방에 안부를 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13일 오전 10시 18분 내가 먼저 워드 파일을 올렸다. 사실 이미 써 둔 글이 있었다. 브런치에도 올려놨던 글이다. 그래도 일주일을 그냥 놀기는 민망해서 다음 주 미션을 먼저 해두었다. 편하게 쓴 일기 같은 글을 타깃 독자를 고려해 그림책 글로 바꾸는 작업이다. 브런치 등록용으로 나의 관점에서 썼던 글과 그것을 타깃 독자인 나의 열 살 딸에 맞춰 바꾼 글을 소개한다.
[초안]
제목 : 아이가 눈뜨는 아침을 함께 하기
<아이가 눈을 뜨는 순간을 관찰하기>
1. 잠자는 아이의 얼굴, 표정의 움직임은 어떤가요?
2. 누운 자세는 어떤가요? 기지개를 켜거나 뒤척임이 있나요?
3. 일어나서 첫마디는 무엇인가요?
4.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무엇인가요?
5. 오늘 아이는 어떤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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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버전으로 수정]
오늘 나의 임무는 너의 아침을 파헤치는 것!
네가 어떤 자세로 잠을 자는지, 표정은 어떤지, 일어날 땐 어떤 몸짓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니?
너도 알지 못하는 것을 파헤치는 것이 이 탐정님의 특기지!
살금살금, 발소리에 깨지 않도록 조용히 접근하기!
성공!
<아침 탐정이 알아낼 것들!>
1. 어떻게 자고 있을까?
2.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3. 움직일 때 어떤 행동을 할까?
4. 깨어나서 제일 먼저 무엇을 할까?
5. 나의 정체를 바로 알아볼까?
이 정도면 되겠지?
휴대전화와 수첩, 볼펜도 준비 완료!
관찰과 기록은 탐정 임무에 가장 중요하지
사진은 딱 한 장만 찍을게. 증거가 필요하거든
자. 작전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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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쓴 글은 브런치에 아이들에 대해 기록을 남기고자 만든 매거진에 수록되었다. 이 글의 타깃 독자는 나와 나 같은 부모다. 매일 다정할 수는 없지만 한 번씩은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자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렇게 사랑스러운 구석이 많은 아이들이라고 잊을만하면 일깨워주기 위해 쓴 글이다. 그런데 내가 만들 그림책의 타깃 독자는 나의 열 살 딸이다. 아이가 읽고, 보고, 이해하고, 재미있어야 한다. 그래서 관찰 기록이니 '탐정' 캐릭터를 넣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탐정의 눈으로 아이를 관찰하는 시점이 되니 더욱 글이 재미있어졌다.
나는 이렇게 편하게 쭉~ 쓴 글을 그림책 버전으로 수정하는 과정을 2주에 걸쳐 진행하려고 계획했다. 그런데! 함께 하는 회원들이 올린 초안은 이미 그림책 버전의 글이었다. 처음부터 '그림책을 만들겠어!', '이 주제로 써야지!' 한 사람들은 그림을 함께 생각하며 글을 쓰게 되나 보다.
심지어 요정이 등장하는 창작 글도 있었다. J의 글은 거의 서술형 스토리보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림 배경/ 4가지 분할 장면/ 서술/ 대화' 이 모든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었다. 단 일주일 만에. 이렇게 훌륭한 글을 쓰고도 J는 "한 스텝 진행하긴 했지만 이걸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할수록 막막합니다. 맞는 건지도 모르겠어요.'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도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우린 정답을 찾기 위해 창작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내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죠.
이미 훌륭합니다~"
놀랍게도 10월 13일에 맞춰 글 초안을 제출한 사람은 3명뿐이었다. 스멀스멀 불안해졌다. 아직 두 걸음밖에 내딛지 않았는데 벌써 제출기한을 놓치는 인원이 많아졌다. 하지만 씩씩하게 얘기했다. "오늘 못 올리셔도 괜찮아요. J님이 한 것처럼 다음 주까지 '그림책에 넣을 글'을 써서 올려주세요."
시간이 지나서 깨달은 점은, 창작은 모두가 같은 속도일 수 없다는 것이다.
멋진 풍경을 보면 누구는 사진을 찍고 싶고, 누구는 글을 쓰고 싶고, 누구는 눈에 담고 싶을 수 있다. 기억하고 남기는 방식과 도구는 다를 수 있다. 그것을 표현하는 속도도 물론 다를 수 있다. 나는 그림보다 글이 더 편하고 친숙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림책을 볼 때도 그림이 아무리 좋아도 글이 없거나 문맥이 안 맞거나 메시지가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어려워진다. 내가 그림책을 배우는 선생님도, 그림책 만드는 강의를 해 준 강사님도 글이 먼저였던 분들이다.
우리 회원 중 그림이 더 편한 사람은 글보다 그림을 먼저 떠올렸다. 말의 표현보다 장면의 표현방식을 먼저 생각했다. 그림 하나에서 앞 뒤 그림이 생각나고, 가지를 뻗어 그림 스토리 보드가 먼저 완성된 분도 있다. 그래서 제출의 압박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그림 먼저 시작하고 동시에 글 쓰는 것이 더 편한 사람은 공통 진도에 얽매이지 말고 자율적으로 진행해도 된다고 공지했다. 다만 소통을 하면서 진행사항을 공유하기로 했다.
골고루 맛있는 주제들은 또 골고루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 Photo by Mike Tinnio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