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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Jun 29. 2019

에필로그 : 내가 만난 포르투갈 사람들

포르투갈이 벌써부터 그리운 이유

포르투 여행 1주 차에 쓴 글에 이런 부분이 있다.


"남은 3주의 여행에 더 많은 현지인들이 함께하길! '내가 만난 포르투갈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글도 쓰고 싶으니까."


다행히도 에필로그에서 떡밥 회수를 할 수 있게 됐다.




큰 기대 없이, 별 계획 없이 간 포르투갈은 28일 동안 나를 완전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저렴하지만 알찬 음식, 알록달록 집들, 눈이 확 트이는 넓은 강변의 풍경 등 좋았던 건 열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로 많지만 그중에서도 엄지를 들고 이야기하고 싶은 건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이다. 



수다쟁이 사진작가 리카도 

리카도는 포르투에서 처음으로 긴 대화를 나눈 현지인이다. 숙소 근처 카페였던 '콤비 커피(Combi Coffee)'에서 만난 그는 자신을 사진작가라 소개했다. 

▶참고글 : #4. 포르투 카페에서 그림 그리다 생긴 일


리스본으로 이동하기 전날 다시 한번 콤비 커피를 방문했다. 신기하게도 리카도를 또 만났다. 카페 주인과 대화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눈썹을 한 번 들썩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조금 어색하지만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리카도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스케치북에 낙서하는 나를 지켜보며 이런저런 화두로 대화를 리드했다. 그는 30분 후 일이 있다며 "리스본에 가서도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해"라며 떠났다. 



초대해줘서 고마워, 미구엘과 빅터


미구엘은 H와 P가 동네 버거 맛집 'Casa Guedes'*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가 알게 된 포르투 토박이다. 나는 다음날 아침 빵집에서 에끌레어와 에스프레소를 사이에 두고 그와 통성명했다. 호구조사에 가까운 대화로 가득 찬 아침식사 후 그는 포르투 현지 가이드를 자청했다. 

*포르투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집. 담백한 빵 사이에 족발과 장조림의 중간 맛이 나는 고기와 치즈를 넣어주는데, 진하고 고소한 맛이 중독성 있다. 


'미구엘 워킹 투어'는 한 시간 코스였다. 우리는 가본 적 없던 좁지만 예쁜 골목길을 걸었고, 올라가 본 적 없는 언덕에서 도시 전경을 감상했다. 



"우리 집은 강 너머에 있는 저 도시*에 있어. 다음에 놀러 와!"

그 '다음'이 바로 3일 후일 줄이야. 미구엘은 우리 셋과 본인의 친구인 빅터를 금요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견과류와 말린 바나나가 든 샐러드를 시작으로 포르투갈 전통 소시지인 알례이라, 정어리와 크래커, 과일 등을 먹었다. 처음 삼십 분은 웃는 건 물론이고 숨 쉬는 것까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어색했다. 그러나 다행히(?) 미구엘은 다양한 와인을 준비했고, 우리는 알코올의 도움을 받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포르투에서 강을 건너면 '빌라 노바 드 가이아(Vila Nova de Gaia)'라는 도시가 있다. 포르투의 와이너리들은 대부분 여기 있다. 



밝은 에너지 가득했던 'GARBAGS' 점원

나는 여행지에서 기념품을 잘 사지 않는다. 딱히 수집하는 것도 없고 짐이 느는 것도 싫어하는 탓이다. H와 P도 비슷하다. 그런 우리가 처음으로 개인 지출을 한 곳이 바로 'GARBAGS'다. GARBAGS는 포르투갈의 업사이클링 브랜드다. 손재주가 좋은 7명의 여성이 가내 수공업으로 모든 제품을 만든다. 재료는 버려진 커피나 과자 포장지, 현수막, 생활용품 패키지 등이다. 오프라인 매장은 리스본과 포르투에만 있다. 


포르투에 있는 GARBAGS 매장


빨간 뿔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직원은 시종일관 웃는 표정으로 우리를 응대했다. 큰 목소리로 브랜드와 제품을 소개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자신의 직장과 직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건 항상 즐겁다.



직원의 밝은 에너지에 전염되어 가게 곳곳을 구경하다 결국 작은 지갑 하나를 샀다. 지갑 안에서는 은은한 커피 향이 났다.



"웰컴백"이라 말하던 프로바의 호스트와 직원

프로바는 포르투 히베리아 광장 근처에 있는 와인 바다. 첫 방문은 지나가다 우연히 들른 것이었고, 두 번째 방문은 일부러 우버를 타고 찾아간 것이었다. 재방문의 원인은 포근한 분위기, 저렴하면서도 맛있는 와인, 그리고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해외 와인바는 처음이라 어리둥절한 우리에게 호스트는 인기 메뉴와 그에 어울리는 안주를 자세히 설명했다. 운 좋게도 그날은 라이브 연주까지 들을 수 있었다.  


일주일 후 같은 자리에 앉았다. 주문하려 손을 드는데 우리와 눈이 마주친 호스트가 윗니가 다 보일 정도로 미소 짓더니 "Welcome back!"이라 말했다. 화들짝 놀라며 우릴 기억하냐 묻자 "당연하지"라고 대답했다. 어깨까지 오는 파마머리의 직원도 우리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덕분에 동네 단골집에 온 것처럼 편한 마음으로 와인을 즐길 수 있었다. 



한국어에 관심 많다던 스타벅스 직원

장기 여행을 하다 보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그럴 때 제일 만만한 곳이 어디에나 있는 스타벅스와 맥도널드다. 감기 기운이 올라와 물먹은 솜처럼 몸이 축축 처지던 어느 날 숙소에서 제일 가까운 스타벅스에 갔다. 


"One hot americano, please."

"Are you from Korea?"

"엇...? Yes!"


커피를 가지러 카운터로 가니 머리를 하나로 높게 묶은 직원이 조금 서툴지만 또렷한 한국어로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했다. "Did I say it right?(=저 제대로 말했나요?)"라고 수줍게 덧붙였다. 양 엄지를 들고 정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한국에 관심이 많아서 한국어를 독학 중이라고 했다. 며칠 후 다시 갔을 때는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며 음료 할인 쿠폰까지 줬다. 



포르투 에어비앤비의 호스트 부부, 마팔다와 이스라엘

마팔다와 이스라엘은 2주간 묵었던 포르투 숙소의 주인 부부였다. 

▶참고글 : 1. 머물 곳은 운명처럼 찾아온다


마팔다는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안무가였고, 이스라엘은 영상을 만드는 에디터였다. 아침 일찍 출근해 밤늦게 귀가하는 마팔다와 점심 이후부터 집에서 일하는 이스라엘의 생활 패턴은 정말 달랐는데도 그들은 매일 오후 10시쯤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그들은 서로에게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다정했다. 사소한 질문에도 장문의 답장을 보냈으며, 집에서 마주칠 때 오늘 하루는 어땠냐는 물음으로 대화를 먼저 시작했다. 나는 숙소를 옮기기 3일 전부터는 아쉽다는 말을, 옮기고 나서는 그들의 집이 그립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리스본 호스텔의 주인, '파티 러버' 길버트 

리스본 숙소는 호스텔이었다. 8인 혼성 도미토리 방을 예약하며 '여행자들과의 친목'을 살짝 기대했다. 그런데 정작 친해진 사람은 호스텔 주인이었던 길버트였다. 


호스텔의 아담한 규모와 달리 길버트는 키도, 덩치도 방문만 했다. 위생 관리에 열심이었던 그는 수시로 부엌과 3개의 화장실을 정리했다.* 저녁이 되면 길버트는 방들을 돌아다니며 이렇게 물었다. 

"오늘 파티 갈 사람 있나?"

*어째서인지 귀국 후 베드버그에 물린 것처럼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그래서 추천하고 싶은 곳은 아니다. 


며칠 뒤에나 알게 됐지만, 그가 말하는 '파티'는 크게 봐야 동네잔치였다. 파티가 한창일 것이라던 리스본의 거리에는 삼삼오오 저녁을 먹거나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뿐이었다. 큰맘 먹고 나온 것이 머쓱해 산책 삼아 리스본의 밤거리를 실컷 구경했다. 


길버트는 투숙객들과의 식사나 술자리도 파티라 불렀다. 낯선 사람과도 금방 어울리는 성격의 소유자인 길버트는 파티가 일상인 유쾌한 사람이었다. 



룸메이트였던 호주 남자 다니엘

호스텔에서 만난 사람 중 기억에 남는 또 다른 한 명이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30대 후반의 호주인으로 3일간 내 맞은편 침대에서 잤다. 밤색 파마머리는 어깨를 훌쩍 넘는 길이였고 얼굴에선 항상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유난히 큰 웃음소리와 제스처가 인상 깊었다. 


다니엘은 첫날부터 오래된 친구처럼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니? 한국에서 왔다고? 한국은 아직 가본 적은 없지만 흥미로운 나라라고 생각해. 나는 호주에서 왔어. 벌써 세 달 넘게 유럽 여행 중이야. 오늘 뭐했니? 내일은 뭐할 거야?" 


정신을 차려보니 15분이 지나 있었다. 그가 떠나기 전까지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런 대화가 반복됐다. 

다니엘은 말만 많은 것이 아니라 짐도 매우 많았다. 그래서인지 그가 떠나고 난 뒤의 맞은편 침대는 허전해 보였다. 



리스본 야경 투어 시켜준 카를로스 

마지막은 가장 고마웠던 사람인 카를로스다. 그는 호스텔 바로 옆에 있던 마트 'Auchan(프랑스의 프랜차이즈 마트 브랜드)'*의 푸드코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직원이었다. 

*포르투갈의 마트 브랜드 중에는 'Continente'가 있다. 'Auchan'보다 크고 이마트처럼 PB 상품도 훨씬 많다. 


우리가 한국 사람임을 알게 되자마자 그는 눈을 빛내며 "BTS 알아? 블랙핑크는?"라고 물었다. 

"물론이지. K-POP 좋아하는구나?"

"완전. '쿨'하다고 생각해!"


마트에서 몇 번 더 마주치고 우리는 친구가 됐다. 카를로스는 밤 10시에 일이 끝나면 리스본을 구경시켜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구경'은 새벽 2시에 끝났다. 4시간 동안 카를로스에 대한 많은 것들을 알게 됐다. 이제 만 20살이라는 것과 어렸을 때 브라질에서 이민 온 것, 엔지니어링을 전공하고 싶다는 것 등. 


카를로스 덕에 실컷 감상한 리스본의 야경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리스본을 소개하는 것에서 큰 보람과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을. 





잊지 못할 포르투 히베리아 광장의 야경


여행지에서 기록을 남길 땐 오래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잊지 않으려 수첩 여기저기에 메모를 남겼다. 모두 모아 글 하나에 담아 보았다. 이번 여행이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으로 가득했던 건, 그리고 포르투갈이 '인생 여행지'가 된 건 이들 공이 크다. 


P.S. 다음 글이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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