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가끔 비 오는 날 너무 좋아 미친다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속에 어두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공감을 못 했었다. 비가 오면 모든 게 다 축축하게 젖고 가뜩이나 들고 다니는 짐도 많은데 우산 하나 더 추가되는 게 그렇게 번거로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산도 잘 들고 다니지 않았다. 비 올 확률이 50퍼센트 이하면 우산을 들고 나가지 않았고 8-90퍼센트 이상은 되어야 우산을 챙겼다. 게다가 어렸을 땐 비만 오면 젖는 운동화도 너무 싫었다. 운동화가 젖으면 양말도 젖고 제대로 마르지 않아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그다음 날도 신어야 하는 운동화도 싫었다. 제습기도 없고 여분 운동화도 없던 그 기억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비 오는 날은 그냥 싫었다.
하지만 그 축축한 기억 속에서도 단비 같은 기억이 하나 있다. 고3 여름 어느 날, 복숭아뼈 아래에 빗물이 찰랑 찰랑 느껴질 정도로 비가 정말 많이 내린 적이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단짝 친구와 교실밖을 뛰쳐나가서 쏟아지는 비를 맞았다.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는데도 야간 자율 학습하기 전에 수능을 준비하며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너무 시원해서 한참 동안 친구와 깔깔거리며 비를 맞고 학교를 뛰어다녔다. 영화에선 비를 많이 맞으면 꼭 다음날 감기에 걸리던데 우린 감기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튼튼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기억이 너무나 시원하고 청량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비를 쫄딱 맞고 들어와서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야간자율학습까지 했었다. 생각해 보면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더라도 속옷도 다 젖어서 야간 자율학습 내내 찝찝했을 텐데 그런 것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아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페파피그'를 보면 주인공 ‘페파’ 와 가족들은 비 오는 날 우비를 입고 장화를 신고 물웅덩이에서 'Jumping up and down on muddy puddle~'하며 신나게 노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현실 속 물웅덩이는 항상 피해야 하는 곳이며 신발을 다 젖지 않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곳이기에 페파 가족의 비 오는 날 놀이는 만화에서나 나오는 환상의 놀이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나도 페파 부모님들처럼 하하 호호거리며 아이와 함께 뛰놀 수 있는 어른이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 엄마인 나는 비 맞으면 우산 쓰고, 장화 신으라고 잔소리한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우산을 꼭 챙기고 다니며 비를 맞아 축축해지면 찝찝함을 먼저 느끼는 것 같다. 아이가 어릴때 페파 부모님처럼 못해 줬던 게 마음에 계속 남는다.
여전히 비 오는 날보다 밝고 맑은 날이 더 좋다. 하지만 비가 시원하게 내리는 날이면 그 여름날의 청량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언젠가 아이와 함께 시원하게 비 내리는 날 함께 뛰어놀 기회를 엿보고 있다. 비오는날의 신나는 경험을 남겨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