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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지살롱 Oct 21. 2023

아빠와 아들

어렸을 때 우리 오빠와 아빠는 정치 이야기로 자주 대립했다. 나와 4살 차이 나는 오빠는 내가 초등학교 때 이미 고등학생이었고 그때부터 줄곧 아빠와 싸웠던 것 같다. 아빠가 퇴근하고 들어오실 때 갈색 쇼핑백에 담긴 통닭을 가끔씩 사 오셨는데 두 부자는 그 시간이 함께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시간이었다. 처음에 즐겁게 시작한 대화였지만,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밤늦게까지 끝이날 줄 몰랐다. 통닭을 다 먹고 그 둘을 뒤로 하고 나는 바로 내방으로 들어왔다. 둘은 대화라고 했지만, 내가 듣기엔 싸움이었다. 매번 싸우면서 왜 정치 이야기를 하는 걸까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치 이야기는 둘에게 대화의 물꼬를 트기 좋은 소재였지만, 관계 형성을 위해서는 좋지 않은 소재였던것 같다.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소재였다.


반대로 남편과 아버님의 관계는 다르다. 남편 역시 아버님과는 정치색이 다르지만, 아버님이 반대적인 이야기

를 하시더라도 쉽게 흥분하지 않고 들어 드린다. 자연스레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는데 정치이야기 외에 할 이야기들이 더 많기 때문인 것 같다. 시부모님이 부산에 살고계셔서 자주 못 뵈는데 남편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특별한 일이 없어도 "아부지~별일 없는교~"하면서 전화한다. 아버님은 컴퓨터나 휴대폰에 모르는 게 생기면 바로 남편에게 전화하고 남편은 잘 못 알아들으시는 아버님을 답답해하면서도 끝까지 잘 듣고 해결해 준다. 남편이 어렸을 때 국내 캠핑장이며, 유명 여행지로 가족여행을 많이 다녔다고 하는데 그런 배경 때문인지 남편도 주말이 되면 온 가족 차에 태워 이곳저곳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한다. 아버님은 8남매 중 부모님께 제일 잘했던 아들이었다고 한다. 남편과 아버님을 보며 부자관계는 자연스레 보고 배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커가며 아빠와의 시간이 늘어가고 있다. 남편은 아이와 같이 축구도 해주고 축구 경기도 같이 보며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땀 흘리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남편인데, 아이를 위해 최선의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월드컵 이후로 아이는 축구팬이 되어 K리그에 관심이 많아 졌는데 남편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선수의 유니폼을 사줘서 축구 경기가 있는 날엔 유니폼을 입고 같이 축구를 보며 함께 응원한다. 지난달엔 아이가 좋아하는 선수의 경기를 보러 전주로 가족여행을 다녀오기도했다. 얼마 전, TV프로그램에서 한 외국인이 어렸을 때 주말엔 항상 아빠와 축구경기를 보러 갔었다고 추억했는데 우리 아이도 크면 행복하게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아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아이와 좋아하는 것을 함께 공유하고 시간을 보내게 되니 평소에도 할 이야기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얼마 전까지는 아이가 포켓

몬을 좋아해서 눈만 뜨면 포켓몬이야기만 했는데 지금은 축구이야기를 하고 있다. 덕분에 축구에 관심이 없던 나조차도 K리그 선수들의 이름을 알게 되고, 경기 일정과 리그 순위, 응원가를 계속 접하게 되어 아이가 하는 이야기에 함께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우리 아빠는 항상 바쁘셔서 늦게 들어오셨고 평소에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별로 없었다. 사춘기 때는 자연스레 멀어지고 어른이 되니 더 서먹해진것 같다. 나는 막내이고, 아빠와 딸이라 그런지 관계가 어색하진 않았는데, 성인이 된 오빠와 아빠의 관계는 좁혀지지 않았다. 아빠와 오빠가 공유할 수 있는 뭔가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함께 공유한 시간이 많았다면 서로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버지는 5년 전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유골함은 납골당에 모셨는데 오빠는 계약이 끝나면 아버지의 유골함을 본인 집에 모시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때는 오빠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요즘 남편과 아이의 관계를 보면서 오빠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오빠도 아빠와 살갑게 보내지 못했던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수 없어 그렇게라도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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