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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커 Nov 08. 2023

크리스틴 드 피장

이름을 찾아서, 문학편 #4

en faisant dittiez de eaue sans sel.

소금 없는 물로 시를 짓고...

크리스틴 드 피장, 「여성들의 도시」      


  지금 글을 쓰는 자, 소금 없는 물로 시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을 일이다. 크리스틴 드 피장에게, 영혼 없이 내뱉은 허망한 글귀는 소금 없는 물로 쓴 시로 여겨졌나 보다. 호쾌한 비판이 아닐 수 없다.


  크리스틴 드 피장은 르네상스의 여명기에 해당하는 1364년 또는 1365년, 세계가 중세를 벗어나 근대의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대격변의 시대에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세계사적으로 의미를 지닌 사건들이 이어진 14세기는 이 박학다식한 문필가의 삶에 관한 중요한 단서일 것이다.


  이 무렵의 유럽 연대기를 살펴보자. 1309년, 교황이 아비뇽에 갇히며 반석 같던 교회의 권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1321년, 단테가 신곡을 발표했고, 1331년에는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백년전쟁이 발발했다. 1347년, 유럽은 흑사병의 대유행에 휩싸였다. 흑사병은 이후 14세기 내내 유럽인들을 죽음과 공포로 이끌었다.


  1364년에 프랑스의 샤를 5세가 즉위했는데 크리스틴이 바로 이 무렵 태어났으니 프랑스 왕가와의 긴 인연이 이 시점에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토마 드 피장이 샤를 5세의 자문관으로 초빙받으면서 크리스틴 역시 가족을 따라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었으므로 가볍지 않은 인연이다. 샤를 5세가 아버지를 용한 이후,  자신이 스스로를 프랑스 사람으로 여겼다.


글을 쓰는 크리스틴 드 피장


  1000년을 전후로 헤이안 시대에 태어나 문학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무라사키 시키부와 마찬가지로, 크리스틴 드 피장 역시 볼로냐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지식인 아버지의 딸이었다. 당대의 유력한 지식인 아버지의 존재는 무라사키 시키부나 크리스틴 드 피장의 사례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오랜 역사에 걸쳐 지배층을 위한 공적 교육체계에서 배제되다 보니, 역사상 여성으로서 재능을 떨친 경우의 상당수에서, 그를 가르친 최초의 교육자로 ‘비교적 권위적이지 않은 지식인 아버지’가 발견되곤 한다.


  작은 문제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교육받을 권리가 당연히 있다고 여겨지는 21세기에도, 여전히 학교에 갔다는 이유만으로 총알도 아닌 포탄을 맞는 아이들이 있다. 크리스틴에게 다가와 이성과 공정, 정의로 여성들의 도시를 짓게 한 귀부인들의 자취는 오늘 어디에 있는가. 비록 큰 흐름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으나, 인류 문명의 진보에 회의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크리스틴 드 피장의 모습



최초의 전업 작가라는 타이틀     


  최초라는 타이틀은 항상 묘한 긴장감을 갖게 한다. 역사상 최초라고 확언해도 괜찮은 것일까. 최초임을 증명할 만한 명확한 논거나 증거가 있을까 의심한다. 숨겨져 드러나지 못한 존재, 다만 후대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인 존재는 언제나 있을 수 있다.


  크리스틴 드 피장을 서술하는 키워드로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최초의 여성 전업 작가”다. 최초의 남성 전업 작가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최초의 여성 전업 작가라는 표현은 크리스틴 드 피장에 대해 논할 때 자주 쓰인다.


  배경을 생각해 본다면 탓할 수 없는 술어다. 근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여성은 대체로 사회적인 활동, 무엇보다 경제적인 자립의 토대가 되어야 할 직업 체계에서 제외된 존재였다. 사회적인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직업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으로서 직업을 영위한다는 자체가 사회 규범이나 관습에 의해 부정되었다. 근대에 들어서도 여성이 얻을 수 있는 직업은 가정교사, 간호사, 치료사 같은 돌봄 노동이나, 가정부, 세탁부와 같은 극히 제한적인 영역에 머물렀다. 이런 상황에서 무려 14세기에 여성 작가로서 직업인의 길을 걸었다는 것은 그 재능이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증명하는 증거임은 분명하다. 더구나 프랑스 왕가에 의해 고용된 작가로서 활동했으니 참으로 영광된 성취다.


   이런 대단한 성취의 이면에는 새삼 당시의 녹록지 않은 삶,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여성의 삶이 놓여있다. 1380년, 아버지의 직업적인 경력과 가족들의 생활을 지탱하던 샤를 5세가 세상을 떠난다. 예측하지 못한 불행의 시작이었다. 가세가 급격히 기울면서 아버지 토마 역시 세상을 떠난다. 행복한 가정을 일구었던 남편 에티엔 역시 샤를 6세를 수행하다 감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막 20대의 행복감을 맛보기 시작한 크리스틴은 갑자기 어머니와 세 자녀, 조카를 부양해야 할 처치에 놓였다.


  재혼하지 않고 스스로 가족을 부양하는 길을 선택했으나, 14세기 유럽은 여성이 죽은 남편의 재산을 상속받는 것조차 쉽지 않은 사회였다. 유산상속을 위한 온갖 송사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며 얻은 노하우로 “재산권 행사와 관련된 불공정한 법적 프로세스와 과부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온갖 사기꾼에게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정도의 내용이 담긴 책을 엮었다고 하니 꺾이지 않는 에너지를 느끼게 된다. 만나 보지 않은 사람의 사람됨이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지 않는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었을까 짐작할 만한 행동 양식이다.


  어쨌거나 필경일 등으로 시작해 발라드 시를 쓰면서 차츰 귀족 가문들 사이에서 이름을 알리고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오테아 서한’, ‘기나긴 학문의 길’, ‘운명의 반전’ 같은 책들이 이미 당대에 인정받았다. 1404년에는 샤를 5세의 전기를 쓰는 작가가 되었고, 샤를 6세와 이자보 왕비, 오를레앙 공 루이를 포함한 왕족 가문의 후원 작가로서, 살아서 큰 명예를 얻었다.     


크리스틴 드 피장과 이자보 여왕


장미 논쟁과 여성들의 도시      


  애틋한 연애 감정을 노래하던 발라드 시인이 소란과 불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작가로서 자리 잡은 계기는 논쟁으로부터 왔다. 그 유명한 ‘장미 논쟁’은 크리스틴에게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사회적으로 성장하는 기회가 되었다.


  1401년, 기욤 드 로리스와 장 드 뮝이 쓴 ‘장미 이야기’를 궁정 서기 장 드 몽트뢰유가 천재적인 작품이라 평가하자, 크리스틴은 반박 서한을 보냈다. 몇 차례 서한 논쟁이 이어지자 크리스틴은 오간 편지들을 한데 묶어 이자보 왕비와 파리 참사회장에게 보낸다. 불합리한 것을 두고 보지 않고 논리적으로 파고드는 불꽃같은 성향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파리 대학 총장이 가세하면서 논쟁의 판은 다시 커졌다. 당대에 내로라하는 논객들이 참여한 거대한 사회 논쟁을 거치며 크리스틴의 위상은 커져 갔을 것이다.


  '장미 이야기'는 제목에서 예감되듯, 특히 장 드 뮝이 쓴 후반부에서 여성의 사랑과 욕망을 조롱하는 온갖 혐오의 내용을 담고 있어, 크리스틴으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그의 장기는 각각의 주장을 하나하나 명쾌한 논리로 격파해 나가면서 역사와 문헌에 대한 광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사례를 드는 것인데 이러한 논거 방식은 장미 논쟁을 거쳐 '여성들의 도시'에서 빛을 발한다.


  1405년에 발표된 ‘여성들의 도시’는 장미 논쟁을 통해 첨예해진 문제의식과 논거의 결정판이라고 평가될 만한 작품이다. 직업적인 글쓰기를 이어가면서도,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 이래로 14세기에 이르기까지 여성 비하를 담은 작품이 끝없이 쏟아지는 이유를 캐물으며 혐오의 논점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논파하는 작품을 완성했다.


  여성들의 도시를 만들기 위해 ‘이성’으로 터를 잡아, ‘공정’으로 벽채를 세우고, ‘정의’로서 신성의 첨탑을 쌓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 성채를 올리는 모든 과정에서 거짓된 언설에 대한 반례로서 역사 속 여성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한 권으로, 적어도 서양 문화와 종교의 역사에서 크나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들을 한눈에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예시는 풍부하다. 이쯤 되면 시몬느 보봐르가 크리스틴 드 피장을 위대한 작가로서 20세기에 다시 불러낸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인다.


  '여성들의 도시'안에 담긴 수많은 질문과 답변들은 비록 중세적, 기독교적 세계관이라는 프레임 안에서의 것이라는 한계를 가지지만, 오늘날에도 유효한 문들을 거칠 것 없이 직접적인 어조로 제기하고 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거대한 한 걸음이다.


성당에서 강의하는 크리스틴 드 피장


  잔다르크에게서 새 길을 보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우리가 모르는 새 돈다. 샤를 6세의 광증으로 인해 사실상 프랑스는 권력의 진공 상태로 빠져든다. 크리스틴은 왕의 동생인 오를레앙공을 떠나 왕의 삼촌이었던 부르고뉴 공작의 거처로 옮겨간다. 1415년에는 오를레앙공이 살해당하고, 1419년에는 부르고뉴마저 죽음을 맞는다. 1420년에는 크리스틴의 후원자였던 이자보 여왕이 영국과 협약을 맺고 헨리 5세를 섭정으로 앉힌다. 권력을 차지하려는 정치적 소용돌이와 프랑스 내전, 영국과의 전쟁이 동시에 벌어진다.


  프랑스에 전설적인 영웅이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시기다. 오를레앙의 전사 잔다르크. 자신이 쓴 책의 제목처럼 ‘인생이라는 감옥’ 안에 갇힌 크리스틴 드 피장에게 신의 이름으로 행진하는 잔다르크라는 존재는 하나의 구원이었을 것이다. 1430년에는 '잔다르크 전기'를 직접 썼다. 적어도 그가 죽는 날까지 잔다르크는 강인한 영웅의 모습으로 있었다.


  문필가 크리스틴 드 피장은 멈추지 않는 기관차처럼 쉬지 않고 글을 썼다. 지중해의 태양과 같이 뜨거운 문제 의식과 명징한 논리를 구사한 작가다. 관찰자의 시점에서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담담하게 그려나간 무라사키 시키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결을 지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행간에서 하나의 정신을 본다. 거대행성처럼 푸른 빛을 내품으며 시대를 되묻는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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