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안(平安, へいあん). 일본 문화의 정수를 완성한 시대. 이전의 역사는 헤이안 문화를 완성하는 과정이고, 이후의 역사는 헤이안을 해체하는 과정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일본의 정체성, 적어도 일본 문화의 정체성이라고 부를 만한 이미저리(Imagery)들이 거의 헤이안 시대에 완성되었다. 헤이안 시대에 쓰이고, 헤이안 문화의 살아 숨 쉬는 실체를 모노가타리의 형식으로 승화시킨 작품 「겐지 모노가타리」야말로 헤이안을 넘어 어쩌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는데 반론을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헤이안은 일본 땅에서 794년부터 1192년까지 그 정체가 지속되었으니, 918년 개국한 고려와 더불어 동북아시아 문화권에서 동시대를 구성한 체제다. 한편, 고구려 멸망 후 대조영이 698년 건국하고 1116년까지 지속된 북방의 발해가 시간의 축으로는 일본의 헤이안과 더욱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발해와 헤이안 사이의 협력 관계가 존재했던 증거도 남아있다.
헤이안의 풍경, 작가 미상, 19C
발해의 사신으로 알려진 고려인 관상가가 '겐지 모노가타리'의 첫 장인 제1부 기리쓰보권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면, 양국의 왕래가 지극히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발해에서 온 국사, 고려인 관상가」라는 표현이 이채롭다. 무엇보다 기리쓰보권은, 이제 막 태어난, 천황의 아들이자 이야기의 주인공 「히카루 겐지(光源氏)」의 미래를 예언하고 그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막대한 의미의 장면이 아닌가. 작품이 설명하고 있지 않은 당대 동북아의 정치 외교적인 역학을 궁금하게 만드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되었건, 천황과 그가 너무도 사랑한 여인 「기리쓰보 경의」 사이에서, 작가의 묘사에 따르면 세상에 둘도 없는 아름다운 모습의 황자로 태어났음에도, 어쩐 일인지 관상가의 예언을 따라 「겐」이라는 성씨를 하사 받고 신하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한 남자의 이야기가 바로 「겐지 모노가타리」다.
헤이안의 풍경, 작가 미상, 19C
무라사키 시키부 혹은 후지와라노 쿄코
무라사키 시키부는 세계 문학사상 최초로 소설이라 부를 만한 작품, '겐지 모노가타리'를 세상에 내놓은 작가다. 전체 54권의 구성으로 천황 4대에 걸친 70년의 이야기를 200자 원고지 5000장에 달하는 분량으로 완성했다. 매권마다 등장인물의 생각과 감정을 고도의 절제된 형식 안에 담은 795편의 와카(和歌)는 그 자체로 하나하나 주옥같은 시선(詩選)이다.
400명에 달하는 인물의 개성적인 묘사, 인물과 인물 사이의 사회적, 정서적 관계, 군더더기 없이 명쾌하게 이어지는 사건들, 헤이안의 풍류를 담은 심리의 묘사는 말할 것도 없겠으나, 어머니의 허무한 죽음에 덧대어진 탄생기로 시작해 주인공의 성장과 시련, 영광, 정치적 책략, 그리고 덧없는 스러짐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구조적인 형식미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 하나 현대적인 의미의 소설로서도 부족함이 없는 대작이다.
무라사키 시키부와 시를 논하는 남성들
시대를 생각해 보면 더욱 놀라운 성과 속에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겐지 모노가타리」는 1000년의 시간을 넘어 어떻게 우리에게 도달했을까. 질문은 몇 가지 정황들로부터 시작된다. 「겐지 모노가타리」라는 작품의 제목은 작가가 지은 것이 아니라 후대에 일컬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어찌 보면 대단원의 막이라고도 할 수 있는 히카루 겐지의 출가 혹은 죽음의 장면은 제목만 남아있을 뿐, 그 내용이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 작가가 헤이안의 궁정에서 궁녀로서 살아갔던 후지와라노라는 성씨를 지닌 사람이라 추정하지만, 그의 본명을 확정할 수 없다. 무라사키 시키부라는 이름은 필명이다. 작품 속 히카루 겐지가 가장 사랑한 여성 무라사키 노우에의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여기는 학자들도 많지만 반대 의견들도 있다. 이쯤 되면, 적어도 모노가타리를 하나의 작품, 하나의 정체성으로 연결하는 토대는 한없이 느슨했던 것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작품의 존재가 이토록 강렬하게 살아남은 것이 오히려 신기할 따름이다.
이시야마에서 달을 보며 모노가타리를 떠올리는 무라사키 시키부
질문의 답은 아마도 무라사키 시키부, 혹은 그로 대표되는 헤이안 시대 여성의 삶과 창작을 탐색해야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엄연히 세상에 존재한 작가지만 우리는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확정하지 못했다.그럼에도 다행히 그의 일기가 남은 덕분에 상당한정보가 확인된다.
당대의 여성들은 배울 수 없었던 한자를 익혀 ‘일본서기의 궁녀’라 불릴 만큼 한학에 능한 학자였으나 한학을 내세워 자랑하는 것을 부끄러운 행동으로 여긴 사람이었다. 이례적으로 뒤늦은 나이에 황족을 가르치는 궁녀가 되어 들어간 궁정에서의 삶은 스스로 원하지 않음에도 정치적 책략과 수싸움의 세계에 휘말려야 하는 고단하고 외로운 것이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고독한 삶을 살아간 여성이었음이 분명하지만, 정작 남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당대의 이상을 그대로 현현하여 수많은 여성과 관계를 맺는 귀공자 남성이다. 무라사키의 내면에 도사린 채 세상을 향해 드러내고 싶었던 호방하고 자유로운 정신의 투사이거나, 그가 사랑하고자 한 미상의 이상적인 존재일지 모른다. 어쩌면 이 두 개의 답이 모두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는 아름답고 귀하지만, 탄생의 흠결을 지녔다.
이 모든 아이러니, 서로 부합하지 않는 사실들의 조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부조리는 우리에게 꽤나 익숙한 것이다. 시대의 경계를 뚫고 나온 여성 창조자들의 삶에서 자주 마주하는 기시감이다. 바로 이 부조리야말로 「겐지 모노가타리」가 오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엔진일 것이다.
겐지 모노가타리 속 유가오권의 패러디, 초코사이 잇쇼, 1795-1797
무라사키, 헤이안의 여성들
“여러 해 기다린 보람도 없이 내 집에
등나무를 보려 잠시 들렀나요”
「스에츠무하나의 와카, 겐지 모노가타리 15첩 쑥대밭권(요모기우권)」
겐지 모노가타리에 등장하는 스에츠무하나는 히타치 친왕의 딸로서 존귀한 신분의 여성이다. 거문고를 잘 타기로 알려져, 그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겐지의 주의를 끌게 된다. 미인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 끝에 스에츠무하나의 침소에 들어간 겐지는 그의 붉은 코를 보고 놀라, 어린 와카무라사키와 인형놀이를 하며 스에츠무하나의 코를 비평한다.
“붉은색 꽃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높이 뻗은 홍매화는 마음을 이끌지만”
「겐지의 와카, 겐지 모노가타리 6첩 스에츠무하나권」
결국 위의 15첩은 와카를 지을 줄 모르니 풍류를 모르고, 코가 길고 붉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귀족 여성 스에츠무하나의 후일담을 담은 권이다. 겐지가 하나치루사토를 찾아가다가 쑥대가 가득 자란 버려진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스에츠무하나를 우연히 만나, 자신을 그토록 오래 기다린 사람을 등나무 덕분에 다시 찾았다고 노래하자, 그에 대한 화답으로 전한 와카다. 아오이권과 더불어 새삼 헤이안 여성의 고단한 삶을 절절하게 전하는 권이 아닐 수 없다.
헤이안의 여성들, 그 삶을 규정하는 한마디의 말이 있다면 ‘일부다처제’ 일 것이다. 겐지 이야기 속에서 겐지가 그토록 많은 여성들의 집을, 침소를 넘나드는 것이 의아하고, 난잡해 보일 수 있다. 이 시기의 결혼은 남성과 여성이 일가를 이루어 한집에서 같이 살아가는 형태가 아니었다. 남성이 처를 포함해 여러 명의 여성과 결혼 관계를 맺고 매일 밤 여성들이 살고 있는 집을 옮겨가며 잠을 자는 형태의 생활이 이루어졌다. 그 와중에 선택되지 못한 여성들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끝없이 비참해질 뿐이었다.
눈을 바라보는 무라사키와 겐지, 우타가와 쿠니사와, 1853
모노노케, 원한의 생령을 넘어
겐지의 경우를 보면 애초 ‘결혼 관계’라는 것이 전제되지 않은 채 하룻밤이 이루어지고, 여성에게는 그저 선택됨을 기다리는 것 이외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스에츠무하나는 변함없이 고지식하게 기다린 것이 뒤늦게나마 겐지에게 재발견되어 그의 경제적인 도움으로 말년을 평안하게 보냈다고 하지만, 많은 경우 기다림마저도 그 대가를 얻지 못했을 것임을 짐작해 본다.
스스로 알지 못한 채 모노노케가 되어 원한을 품고 쓸쓸히 생을 마감한 로쿠조미야스도코로의 이야기, 제9집 아오이권 역시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모노노케는 아오이노우에의 몸에 들러붙어 출산 후 죽음을 맞이하게 한다. 원한의 계기는 두 사람의 시종들 사이에 벌어진 신경전이었다. 일부다처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여성들은 때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뜨거운 동지로 남았지만, 이처럼 살아서는 풀지 못하는 깊은 악연의 골짜기에 갇히기도 했다.
이토록 기괴한 문명의 압제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고 지켜나간 여성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흥미롭게도 헤이안 시대는 여성들의 창작활동이 각별히 꽃을 피운 시기다. 당대의 귀족층 여성들에 제한된 이야기라는 것이 아쉽지만, 지배층의 학문인 한문 교육에서 배제되었던 여성들은 새롭게 발명된 가나문자로 자신의 시상을 표현하여 일기의 형태로 묶어냈으며, 모노가타리 문학을 이끌어냈다.
교양 있는 고귀한 여성이라면 와카를 읊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은 여성들을 이중, 삼중으로 부자유의 틀 안에 가두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여성 작가들에게 문학 작품을 남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풍류를 통해 정신을 고양시키고, 생활을 예술로 승화시키려 노력한 헤이안의 문화가 여성들에게 창작의 온실이 된 것이 아이러니하다.
무라사키 시키부 역시 답답하고 무거운 궁정의 공기 안에서마저 스스로 그 존재를 역사에 각인시킨 여성이었다. 그의 모노가타리는 이미 그가 궁정에서 살던 시기에 독자를 양산했다는 정황들이 있다. 그가 죽은 지 1-2세기도 되지 않아 '겐지 모노가타리'는 헤이안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지고, 높이 평가되었다. 천년이 지난 뒤에도 작품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인간과 문명의 재발견, 시대정신의 예술적 승화라는 문학의 소임에 충실했던 것과 더불어, 여성의 삶을 극히 제한적인 틀에 가두었던 헤이안의 문화적 풍토가 자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의 모순된 삶 속, 그가 남긴 놀라운 유산은 타고난 운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비록 그가 살아간 시대에는 많이 기울었다고 하지만 체제를 이끌어 간 가문의 후예로 태어나, 아버지의 한학과 시문에 대한 재능을 물려받았고, 가나를 사용한 모노가타리가 자리를 잡아가던 시대를 타고났으며, 넘치는 정취를 정제된 와카로 표현할 수 있었던 덕분에 풍류의 전문가로서 궁정에 받아들여졌다.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으로 궁정의 정치 투쟁에서도 살아남았다.
춤을 추는 겐지의 모습, 야시마 가쿠테이, 1819
그러나, 그의 비범함은 행운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길지 않은 삶의 시간 속에서, 그는 매일 쉬지 않고 일기의 형태로 시를 짓고, 매일 쉬지 않고 스스로 아름답게 여긴 한 사람의 삶과 그 자손들의 후일담을 모노가타리로 남겼다.
나는 그의 이름을 찾고자 했지만, 여전히 그의 이름을 모른다. 보라색을 상징하는 무라사키, 아버지의 직책인 시키부로 세상에 남았다. 그 뒤편 어딘가에 그의 삶이 놓여있을 것이다. 다만, 그가 글을 남길 수 있었기에, 천년이 지난 뒤에도 「이야기」로서 세상을 떠돌다 누군가 그 문장의 틈에서 깊은 쓸쓸함을 발견한 것에 마음을 놓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