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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커 Oct 28. 2023

AI의 시대, 이름을 찾아서

이름을 찾아서, 문학편 #1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1968년)     


  조금은 뒤늦게 AI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들면서 김수영을 떠올리는 건 운명 비슷한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도, 오늘, 임계점을 지난 2023년 가을, 문명의 대혼돈 속에서 조금씩 흐려져 간다. 1968년, 명동, 늦가을의 술자리에서 그를 대면한다면 주정뱅이 꼰대 선생을 피해 슬그머니 자리를 떴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실체를, 온도를 모른다. 그의 숨소리나 풍취, 톤 앤 매너를 전해 듣지 못했다. 그의 시대를 살지 못했고, 그 시대를 연민하지 않는다. 다만, 김수영에 대해서는 그가 남긴 ‘글자들’, 이제는 패션의 일부일 때나 비로소 트렌드 위로 떠오르는 ‘시’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우연히 김수영의 시들을 읽고 그가 한국인의 언어 속에서 발견한 리듬과 소담한 정취가 스며든 말들, 그와는 정반대의 공간에 서 있는 거대한 세계관 따위에 매료되었을 뿐이다. 1960년대 서울 골목 주점의 말들, 더러운 말, 작은 말, 아름다운 말, 노란 텅스텐 등 밑에서 주정뱅이들의 숨소리와 뒤섞인 말들마저 소중한 유산처럼 보였다. 거대한 뿌리와 풀, 기침과 눈의 노래를 거침없이 나만의 것으로 오독해 나가면서도, 그의 한마디, 인상적인 한마디를 소화하는 데 오래 걸렸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은 어떤 것인가. 몸이라는 극히 물리적인 오브제는 시적인 관념의 세계와 어떻게 만나고 부딪힐 수 있을까. 심지어 밀고 나가다니, 어디까지나, 나라는 ‘존재’(그 존재를 고정적인 무엇인가로, 선험적인 무엇인가로 확고하게 신뢰할 수 있다면)가 주제로서 직접적으로 대상에 지극히 관여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해석될 여지가 없는 말이다. 게으른 이원론의 프레임 안에 갇혀서는 소화할 수 없는 말이다.

 

  인간이 시를 쓰는 과정이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 임을 여전히 소화 중인 나로서는, AI가 시를 쓰는 시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금은 고민해 볼 필요도 있을지 모른다. 수영의 말처럼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시대적 담론과는 말하지 않아도 조용히 거리를 두는 사이임은 밝힐 필요도 없다. 러다이트(Luddite)의 시대정신으로, 기계를 깨부술 정도의 열정과 기상을 품어보기에는 이미 19세기를 살다 간 사람들의 허무한 패배가 너무 컸다. 역사가 증명한 흐름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미켈란젤로 스타일, 아침 빛으로 가득 찬 바닷가, 구글 딥드림제터레이터가 몇 개의 프롬프트로 그린 그림, 2023. 10. 28.


  AI. 물리적 주체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드웨어의 물성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수많은 전기 신호들의 흐름과 파동은 엄연히 물성을 지닌 존재다. 물성이 없다고 해서 주제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법적 존재를 ‘법인’이라는 관념을 상정해 인정해 왔다. 법적 행위를 하고, 책임과 권리를 지닌 주체로서.


  그런 의미에서 최근 할리우드의 작가들이 벌인 노동 쟁의는 차라리 합리적이다. 적절한 시점에 벌인 적절한 의사소통이었다. AI의 작품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작가들이 온몸으로 밀고 나간 끝에 세상에 내놓은 작품들을 기계 학습해 모작하거나, 교배한 것들이 아닌가. 그들이 창조해 낸 ‘언어, 이야기, 스타일, 아이디어’를 모방하고 되풀이할 뿐이라는 주장은 타당하다.


  물론 반론도 있을 수 있다. 미메시스의 미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간 작가의 작품이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의 한정된 세계가 반영된 한정된 언어로, 선대의 작품들을 창조적으로 오독하고, 소화하고 교배한 끝에 만들어낸 무엇인가를 새로운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반론 역시 들여다볼 필요는 있다.


  결국 문제는 주체다.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온몸으로 밀고 나간, 분리할 수 없는 주체는 어디에 있는가. 그 이름은 무엇인가.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없을 때, 작품이 주는 예술적인 각성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애초 예술적인 경험과 각성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이 모든 존재론적인 질문들에 깊이 빠져들기 전에 다른 차원의 질문이 나를 기다린다.



모든 언어는 과오다. 나는 시 속의 모든 과오인 언어를 사랑한다. 언어는 최고의 상상이다. 그리고 시간의 언어는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적인 과오다. 수정될 과오.」                        

김수영,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1966년)     


  디플(Deepl)은 어디까지 번역할 수 있을까. 디플이 인간 번역가를 이기는 날은 셰익스피어의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를 나 자신이 납득할 수 있도록 번역해 내는 바로 그날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다. 작가의 작품, 맥배드 5막 5장에서 아내의 죽음을 확인한 맥배드의 독백 중 가장 유명한 일부분이다.


  나는 아직 이보다 삶의 허무감을 정결하게 드러낸 시를 발견하지 못했다. 한 단어, 한 단어가 모두 올바르게 제 자리에 서서, 제 의미를 드러내고, 조금의 어긋남도, 어색함도, 과장됨도 없이, 비로소 한 덩어리의 의미가 되어, 사람과 삶의 시작과 끝을 노래한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들을 생각하면 그가 시인으로서 가진 재능은 두 번의 말이 필요 없을 것이지만, 이 작품을 이기기는 어렵다.


  아마도 이 시를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맥락의 학습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실다간 시대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 그 시대의 언어, 그 시대의 문학, 그 시대의 시적 언어,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옮겨질 우리말의 문화적 맥락, 우리 시의 언어적 맥락, 영시 번역의 언어들, 시어들의 맥락을 거치지 않고 이 시를 완벽하게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언어는 과오다.‘ 시 속의 모든 과오인 언어를, 수정되어야 할 감정의 과오로서의 시를 AI는 다룰 수 있을까. 그 아이러니를 소화해 낼 수 있을까.


  적어도 제인 오스틴처럼 쓰기, 셰익스피어처럼 쓰기, 윌리엄 블레이크처럼 쓰기는 이미 가능하다. 인간은 자기 언어의 성 속에서 살고, 그 성은 유한한 존재이며, 자신만의 독특한 어투를 가진다. 지문처럼 사고의 패턴이 존재한다. 우리는 러다이트 시대의 사람들처럼 열정적으로 AI의 존재를 파괴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한다. 다만 의심한다 해도, 이미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그들은 우리 앞에 서 있다.


  AI가 과오인 언어를, 감정의 과오인 언어를 쏟아낼 가능성이 현실이 되는 것은 아마도 시간의 문제일 것이다. 그 거대한 흐름은 이미 우리 앞에 와있다. 맥베드의 한탄을 절절한 우리 시어로 우리에게 되돌려 주는 AI 번역가 역시 3년 이내에 올 것임을 많은 학자가 예언한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Deepl을 연다. 여기 오늘의 증거를 남긴다. 2023년 10월 28일 Deepl이 번역한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를 원문 그대로 남긴다. 위안을 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Creeps in this petty pace from day to day,

To the last syllable of recorded time;

And all our yesterdays have lighted fools

The way to dusty death. Out, out, brief candle!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Speech: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by William Shakespeare

(from Macbeth, spoken by Macbeth)


내일, 내일, 내일, 내일,

날마다 이 사소한 속도로 기어오른다,

기록된 시간의 마지막 음절까지;

그리고 우리의 모든 어제는 어리석은 자들을 밝히고

먼지가 많은 죽음으로 가는 길. 꺼져, 꺼져, 짧은 촛불!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 불쌍한 선수 일뿐입니다,

무대에서 자신의 시간을 뽐내고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야기입니다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찬 바보가 들려주는 이야기,

아무 의미도 없는


by Deepl, Vr. 2023.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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