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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커 Nov 01. 2023

크리에이터, 작가들

이름을 찾아서, 문학편 #2

  그들의 이름을 써 내려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크리스틴 드 피장, 무라사키 시키부, 허초희,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 제인 오스틴, 브론테들, 버지니아 울프, 에밀리 디킨슨, 실비아 플라스, 박경리, 토니 모리슨.


  굳이 말하자면, 그들은 무명이 아니다. 오히려 문학의 역사에 중요한 발자국과 이름을 남긴 이들이다. 당대의 평가가 어떠했든, 결국은 발견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긴 크리에이터들이다. 더 많은 작가가 무명인 채로, 아무도 그 재능을 들여다봐 주지 않는, 심지어 스스로도 제 역량을 확신하지 못한 낯선 존재로 사라지는 것을 생각한다면, 살아서든, 죽어서든 이미 충분히 보상받은 작가들인지도 모르겠다.              


동화 삽화를 위한 이야기, 얀 노박, 1921_1944


  그럼에도, 천년의 문학사, 두터운 명부 속에서 도돌이표라도 붙인 듯 다시 불러낸 이름들을 써 내려간다. 역사를 뚫고 나온 이름들마저 이전과는 다른 속도로 빠르게 스러지고 있다는 경고음들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오늘을 위해서다. 문학에 이르러서 그 경고음은 다른 장르를 압도한다. 문학은 그 자체로 문명의 프레임 안에서 하나의 장르가 되었고, 한 줌 장르 애호가들의 소박한 놀이터가 되어가고 있다. 위대한 작가의 시대를 지탱한 그 이름들을 되새기고 되새겨도 대세의 향방을 뒤집을 방법은 없을 것이다.


  30초 숏폼의 문법이 시선을 이끌어가는 시대에 때로는 1000페이지에 달하는 원전을 읽어내는 노고를 감당할 독자들의 커뮤니티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영상의 언어가 종이책의 언어를 압도한 지 오래다. 문학이 발견한 인생을 독자의 내밀한 시각으로 재창조하는 상상의 즐거움은 편집된 이미지의 향연에 자리를 내주었다.


  문학 내부의 구조적인 변화, 하위 영역의 이합집산, 새로운 혼종 장르의 등장 역시 변화의 밀도를 높인다. 좁아진 운동장 안에서도 끝없는 질적 변화가 이어진다. 웹소설을 문학의 지평 안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움찔거리고 있던 사이, 드디어 AI 작가, 크리에이터의 시대를 당면한다. 그들은 그저 현상의 표면에 잠시 떠올랐다 사라질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창작자들이 스스로 권리를 지키기 위해 피켓을 들고, 노동 쟁의를 벌여야 할 정도의 존재감을 이미 획득했다.


프랑켄슈타인, 짐 토프, 1977

 

그리고 따뜻한 손

     

  명부를 적어 내린다. 손을 잡듯이, 누군가의 따뜻한 손을 잡고 산책하듯이.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9시간의 산행 끝에 도달한 정상의 양지바른 곳에 앉아 그저 햇살을 즐기듯이. 별 고민 없이 써 내려간다.


  마침내 남은 것은 생애를 통해 ‘결여와 잉여’, ‘투쟁과 복종’, ‘상승과 추락’, ‘묵언과 소란’의 극단 사이를 끝없이 배회하며 그들의 문학을 ‘온몸으로 밀고 나간’ 인물들이었다. 그렇다. 분명 온몸으로 밀고 나간 그 삶의 에너지가 활자 속에서마저 숨길 길 없이 꿈틀대는 이들이다.


  명징하지 못한 선택의 기준에 대해 애써 변명을 준비할 마음은 없다. 적어도 그들은 세상의 틈, 지독하게 좁은 틈새 어딘가로부터 뚜벅뚜벅 걸어 나온 이들임이 분명한데, 논리적으로 설계된 계측의 기준을 찾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애초 논리적 기준을 고려하지 않은 명부다. 그나마 작가와 시대의 의미를 찾아나가기 위해 연대를 고려하기는 했다.


  기꺼이 그네들의 이름을 단출한 무대 위로 불러올린다. 그 안에서 무엇이 벌어질지 예상하기 어렵다. 작품에 대한 통렬한 질문이 될지, 그 삶에 대한 경외와 절망이 될지, 그들의 사상을 배양한 풍토와 콘텍스트에 대한 잡설이 될지. 그 모든 것을 담고자 했지만 하나의 인상 비평으로 끝날지도. 어쩌면 그 이름들은 이 무대 위에서 조금은 다르게 서술된 묘비명을 얻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겐지 모노가타리 중 「밤매화」 장, 숨어있는 무라사키 시키부, 우타가와 쿠니사다, 1857


잊히다     


  사람들은 「프랑켄슈타인」의 존재를 알지만, 더 이상 소설로, 원전으로 읽지 않는다. 원전의 작가가 누군지는 더더욱 묻지 않는다. 최근의 한 강연에서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작가가 누구인지 물었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다. 대체로 소위, 문학 작품, 특히 고전의 테두리에 들어갈 작품이 읽히지 않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겐지 모노가타리」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이 일본 문학, 더 나가 세계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대체로 많이들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들어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다만,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특히 작가의 나라, 일본에서는 여전히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은 것에 새삼 감탄할 뿐이다. 일본 문학사상 최고의 문인을 묻는 설문에서 그의 이름은 여전히 상위를 차지하곤 한다. 이 역시 공교육의 결과가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본다.


  이 두 작품의 작가가 여성임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을 찾기도 생각보다 쉽지 않다.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크리처’의 그로테스크한 외모나 작품의 어두운 분위기 덕분인지, 아니면 장르 자체의 아우라 때문인지, 그저 원전을 접하지 못한 까닭인지 작가의 성별을 발견하고 놀라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문학사에 하나의 장르를 탄생시킨 작품의 위상이 부르는 편견일지도 모른다.          


  대체로 1008년을 전후해 완성된 것으로 알려진 겐지 모노가타리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주인공이 헤이안 시대의 귀족 사회에서 벌이는 사건들, 끊임없는 투쟁과 영광, 몰락을 그린 작품이다.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천착했다는 점에서 우리가 사랑해 온 소설 장르의 한 원형이 된 작품임이 틀림없다.


  작품의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작가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인지도는 거의 미미하다. 황실을 둘러싼 권력자들의 암투, 끝없이 등장하는 주인공의 연애담 같은 것들이 작가에 대한 편견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일지 모른다.

     

되새기다  


  그 이름을 불러 존재를 확인하며, 되새기고 다시 되새기는 것은 인간 고유의 의식이다. 쓰는 사람이 오히려 읽는 사람보다 많아지는 시대, 종이책이 비록 사라지지 않더라도 하나의 패션으로 남을 것 같은 예감을 감출 수 없는 시대, 영상의 문법들이 더욱 깊이, 더욱 널리 받아들여지는 시대, AI 작가, 크리에이터, 번역가, 디자이너들과 함께 살아 나가는 시대, 그래서 누군가를 인간 작가라고 불러야 하는 시대를 숨 쉬며, 되새긴다.


  그 존재를 확인한다. 바로 그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       


Tell Me a Story. 진흙과 유리 속 이야기 예술, US Information Agency(1953-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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