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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커 Nov 11. 2023

난설헌, 경번 혹은 초희

이름을 찾아서, 문학편 #5

  소란하고, 소란하고, 소란하다. 적막하고도 다채로운 소란한 삶을 살다 가더니, 죽어서는 오로지 소란 속에 있다. ‘이름을 찾아서’라는 수수한 제목의 소소한 프로젝트에 난설헌 허경번, 혹은 허초희는 이름마저도 소란을 불러일으킨 존재로서,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는 선택이 되었다.


  문필가 난설헌은 한시로서 16세기 동북아시아 문학계를 들썩이게 하며 바람을 일으키더니, 예술을 사랑한 위대한 군주, 청나라의 강희제가 난설헌의 시집만은 반드시 구해오라는 명을 내렸을 만큼 문재(文才)로 세상을 놀라게 한 인물이다.


  중국과 일본에서의 이런 높은 명성에 정확히 비례해, 고국 조선에서는 부녀자로서 감히 시를 쓴 죄, 특히 제 이름을 걸고 시를 쓴 죄, 무엇보다 건방지게도 자호(自號, 스스로 부르는 이름)를 만들어 잘못된 이름, 「경번」을 대국, 중국에까지 널리 알린 죄를 수백 년에 걸쳐 꾸역꾸역 추궁당해 왔다. 생각해 보면 고국, 정확히는 고국의 학자들이 가장 그의 문재를 평가절하하고, 그 존재 자체를 철저히 무시하거나 심지어 비난하고 있었던 셈이다. 조선에서 절판된 시집을 구하기 어려워 일본에서 간행된 시집을 거꾸로 들여와야 했다니, 고국의 대우라는 것이 사뭇 놀라울 지경이다.


허난설헌, 작가 미상


  그뿐인가. 난설헌의 시가 중국의 한시를 모방했다는 표절 시비는, 더욱 문제적이다. 오랑캐 여인의 시가 중국에서 널리 애송되는 것을 경계한 중국 학자들의 민족주의적인 관점도 간혹 있지만, 조선 학자들의 지적은 끈질긴 편이다. 실제로 난설헌의 시구 중에 한시의 자구와 유사한 경우들이 있어 표절 시비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애초 자신의 시를 불태워 후대에 남기지 말아 달라 유언했음에도, 동생 허균이 태워진 시들에 슬퍼하며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에 남겨졌던 시, 허균 자신이 외우고 있는 시를 모아 만든 시집인지라 논란과 시비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방법은 안 보인다. 이 문제는 오로지 문학적인 관점에서, 한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제대로 된 작품 해석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 잣구 몇 개로 단정 지을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지극히 정제된 한시라는 장르에서 하나의 이디엄처럼 사용되는 문구를 독창적인 시상(詩想) 안에서 새롭게 표현했다면 이를 표절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뛰어난 문필가 허균의 손을 탔느냐의 문제 역시, 반례가 없다면 예술을 사랑한 허균의 안목과 철학을 믿는 수밖에.


  이름마저 소란했던 그가 스스로를 무엇이라 불렀건, 난설헌, 허경번 혹은 허초희의 삶과 문학세계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만약 그의 삶을 그대로 옮긴 영화가 있다면 지나치게 장르적이라거나, 지나치게 클리셰로 가득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영화보다 더 비극적이고, 영화보다 더 논란으로 뒤덮인 삶의 다른 예를 찾기가 쉽지 않다.


  누군가는 난설헌을 신선, 선인(仙人)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혁명가라 부른다. 다른 누군가는 그를 인성 고약하여 당대 여성으로서의 정순한 덕목을 버린 배덕자로 보았다. 오늘의 우리는 그의 삶과 문학을 통해 무엇을 보아야 할까. 끝없는 질문을 남긴 삶, 다시 돌아보면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그를 만나게 되는 삶을 여기 마주한다.     




가족의 비극     


  1563년. 난설헌은 강릉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경포호를 끼고 사임당의 집과 난설헌의 집이 상당히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대관령의 산세를 등진 채 바다를 바라보는 강릉의 자연이 그들의 삶과 문학, 예술적 심미안에 영향을 미쳤을 것임을 짐작해 본다. 난설헌의 오빠 허봉이 사임당의 아들 이율곡을 탄핵한 결과 조정에서 쫓겨나 술로 화병을 달래다 세상을 떠난 것이 안타깝다.


  높은 벼슬을 지낸 아버지 초당 허엽과 어머니 강릉 김씨는 허성을 포함한 이복형제들과 허봉, 난설헌, 허균, 삼 남매를 자연 속에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전인적인 교육을 받게 하는데 주력했다. 자녀들의 예술가 기질, 성리학에 치우치지 않고 도교의 사상까지 수용한 상상력은 부모의 이러한 교육태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문장가인 아버지의 재능과 읽고, 질문하고, 토론하는데 자유로운 분위기의 가정교육 덕분에 자녀들의 문장이 모두 뛰어나, 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을 흔히 허씨 오문장이라 부른다.


  다만, 아버지는 난설헌을 적극적으로 가르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조선의 16세기는 이미 지배층의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전국의 가정 안으로, 일상으로 스며들어 여성은 오히려 교육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 교육받을 수 없도록 감시당하는 존재가 되었다. 난설헌 자신이 언급했듯이 조선에서 난 것도 서러운데, 하필 16세기에 난 것은 더욱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빠들의 공부를 곁눈질해 옆에서 배운 학문과 문학이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 수준에 도달했으니, 살아서 누리지 못한 자유와 명예가 한탄스러울 뿐이다.


  난설헌의 가문은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믿기 어려울 정도의 큰 불행을 겪는다. 아버지 허엽은 난설헌이 18세에 객사했고, 난설헌이 26세가 되었을 때 그의 귀재를 인정하고 한시의 세계로 이끌어 주었던 오빠 허봉이 못다 한 정치의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난다. 난설헌은 오빠와 자신의 어린 두 자녀를 모두 잃고 태중의 아이마저 잃은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서 작품을 모두 태워달라는 유언과 함께 2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우리에게는 홍길동전의 작가로 기억되는 동생 허균 역시 귀양살이 중에 난설헌의 죽음을 들었으며, 이후 50세 나이에 혁명을 꾀한 죄로 능지처참 형을 받아 죽었다. 가문은 오랫동안 허균의 죽음과 죄로 인한 연좌제에 시달려야 했다. 활기 넘치던 천재들의 집안에 이토록 엄청난 파도가 몰아칠 줄,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의 여성     


  16세기 조선의 여성, 그 지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 조선 초기 여성의 삶을 알 필요가 있다. 무엇이, 어떻게, 왜 바뀌었는지의 맥락을 알아야 통찰할 수 있는 문제다.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여성들이 얼마나 자유분방하게 살아갔는지 알려주는 사료들이 많다. 고려의 모든 기풍은 새로 집권한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는 극복해야 할 과제였을 것이다. 애초 고려의 곪아 터진 문제들을 타파하겠다는 명분으로 새 나라를 열었던 만큼, 개국 후 고려가 남긴 것들을 바로 잡는 분위기가 이어지며, 불교와 여성은 중요한 사회 개혁 대상이 되었다.


  조선의 지배층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성리학의 이데올로기는 15세기말 성종이 「경국대전」을 편찬하면서 법제화되기에 이른다.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여 질서를 만들고 풍속의 문란을 통제한다는 ‘내외법’의 명분은 ‘여성 외출 금지’, ‘여성 재혼 금지’ 등의 차별적인 형태로 법제화된다. 참으로 기막힌 법리의 비약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 유지되던 남귀여가혼속(男歸女家婚俗, 남자가 신부의 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른 후 처가에서 살다 자녀가 성장하면 본가로 돌아오는 풍습)과 자녀균분상속(子女均分相續, 재산을 성별과 무관하게 균등 상속함)과 같은 풍습은 사라지고, 여성은 강력한 규범을 통해 각별히 통제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사임당의 경우에도, 결혼한 후 수십 년이 지날 때까지 친정인 강릉에서 생활하며 율곡을 포함한 자녀들을 키웠다는 자료가 남아있고, 난설헌 역시 오랜 기간 친정에서 살았던 것을 보면 남귀여가혼속은 16세기 중반까지도 지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예술혼이 꽃필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일 것이다. 16세기 이후 조선의 인위적이고 개악적인 제도 개편이 없었다면 살아남았을 수많은 재능들을 생각해 본다.     



시로 돌아가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난설헌이 감회를 읊은 시 한 편을 들어, 그 뜻이 방탕하다고 말했다. 그가 방탕의 예로 든 시는 이런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방탕을 읽은 안목은 어디서 온 것일까.    


  燕掠斜簷兩兩飛  제비는 짝을 지어 처마를 스치며 날고

  落花撩亂撲羅衣  지는 꽃은 어지러이 비단옷을 스치네

  洞房極目傷春意  규방에서 한 없이 바라보는 마음 아픈데  

  草綠江南人未歸  녹음이 짙어가도록 낭군은 돌아오지 않네     


  여성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통제하고 제한한 것을 비판하는 난설헌의 시도 보인다. 「莫愁樂 一」 이라는 제목의 시다. 평생에 걸쳐 천여 편 이상의 시를 쓰며 연작을 많이 남긴 시인이다.      


   家住石城下  집이 석성 아래에 있어

   生長石城頭  석성에서 나고 자랐네

   嫁得石城婿  석성의 남성에게 시집가니

   來往石城遊  석성을 오가며 놀 수밖에     

 

 모든 구에서 석성이라는 공간이 등장한다. 질리도록 되풀이해 강조하는 위트가 흥미롭다. 평생 석성이라는 장소를 벗어나지 못한 한 여성의 이야기는 그 시대 여성들의 제한된 권리를 은연중에 부각한다.


  그런가 하면, 연작시 「출새곡(出塞曲)」은 전쟁의 비극을 절절히 그린다. 문득 그 생생한 표현은 상상력으로부터 왔을지, 기민한 관찰로부터 왔을지 궁금해진다.      


  昨夜羽書飛  어제 급한 파발이 날아와

  龍城報合圍  용성이 포위되었다 하네

  寒茄吹朔雪  호적 소리 눈보라 속 울림에

  玉劍赴金微  칼차고 금미산을 달리네

  久戌人偏老  오랜 전쟁으로 몸은 늙어

  長汀魔不肥  먼 출정에 말마저 비루하네

  男兒重義氣  남아 의기는 소중하니

  會繫賀蘭歸  부디 하란의 적을 묶어 개선하길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규중 여인으로서 시를 짓는 것이 원래부터 안 좋은 일이지만, 중국에까지 유명하기는 하다....난설헌이라는 호 하나도 과분한데, 이름까지 경번으로 잘못 알려져 천년에도 씻기 어려운 일"이라고 강조한다. 자호를 삼은 것이 그리도 비난받을 일인지 궁금해진다. 이미 근대에 들어선 조선의 후기, 선각이었던 실학자들의 생각이 이렇다면 다른 평가들은 굳이 듣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난설헌을 신선이라고 부르는 데 반대한다. 그를 전사라고 부르는 것 역시 반대한다. 배덕자나 표절자라고 부르는 것에도 반대한다. 그의 시가 그리는 영역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대한 것처럼, 칭찬이든, 비난이든, 신성화든 하나의 굴레에 가두어지지 않는 인간형이다. 아마도 그를 굳이 서술해야 한다면, 그 모든 것, 그 너머까지를 포함한 총합에 가깝지 않을까. 빚어진 모든 소란은 쉽게 규정되지 않으려는 그 자신의 본질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200수가 넘는 남아있는 시를 여기 모두 담을 수 없으나, 그가 마지막 남긴 시를 옮겨 본다. 죽음을 앞둔 그날, 죽음의 예감을 그린 그 순간의 시조차 압운과 강력한 색감의 이미저리를 저버리지 않는다. 시인이다. 그저 시인이다.


  今年乃三九之數   올해가 3·9수에 해당하는데

  今日霜墮紅           오늘 연꽃이 서리 맞아 붉어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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