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만나게 되는 얼굴들이 있다. 도서관에서 끝도 없이 서식하며 사상의 깊은 동굴을 파 내려가는 사람들이다. 카를 마르크스가 대영박물관의 열람실에서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을 써 내려간 것은 꽤나 알려진 사례다. 버지니아 울프의 도서관에 얽힌 애증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역시 조금은 놀라움을 준다. 그에게 도서관에서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은 '생각의 장벽' 같은 존재들은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다만, 공공 도서관 예산을 삭감하는 정치라는 새로운 장벽들이 간헐적으로 등장하고 있기는 하다.
이들에게 도서관은 그저 책을 쌓아두는 공간이 아니다. 위대한 사상의 탑을 쌓은 거인들을, 눈을 반짝이며, 두근거리며 만나고, 손을 건네고, 숨도 쉬지 못한 채 속삭이듯 대화하는 공간이다. 그 깊은 동굴 안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면 아직 거인의 어깨 위에 앉아 저 너머의 세계를 바라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A Pair of Boots (1887), Vincent van Gogh
도서관에서 만난 또 한 명의 인물은 메리 앤 에번스, 스스로를 「조지 엘리엇」이라고 부른 글쟁이다. 엘리엇 역시 어머니의 병으로 기숙학교를 옮겨 다니던 끝에 결국 16세에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지만, 인생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시간에 도서관으로 침잠했다. 침잠의 시기 동안 그는 위대한 사상가들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도서관의 수많은 서책 가운데 그를 열망하게 하고 들뜨게 만들고 새로운 기대로 향하게 만든 섹션은 아마도, 당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극렬하게 화학 작용을 거듭하며 완전히 새로운 사회 문제를 뱉어내던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사회를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가치 있는 생각들, 진보적인 사상가들의 낮은 웅성거림으로 가득 찬 사상계의 장이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 고전의 아름다움, 비장미, 정신을 고양시키는 비극의 울림 역시 그를 사로잡았다. 위대한 정신을 향한 긴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아버지의 후원으로 에이버리 홀 도서관에서 보낸 자유로운 시간은 그에게 영원히 꺾이지 않을 듯한 정신의 힘을 부여했음에 틀림없다. 그 깊은 침잠 덕분에 우리는 당대를 풍미한 사상가이자, 생각의 편집자, 번역가, 그리고 비록 그 자신은 달갑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제인 오스틴의 뒤를 이은 특별한 소설가와 만나게 되었다.
Factories at Clichy (1887) Vincent van Gogh
로즈 힐, 코번트리
도서관만큼이나 그를 성장시킨 또 하나의 공간이 있다. 어머니가 결국 세상을 떠난 후, 가문의 자산은 오빠 아이작이 물려받았다. 16세가 된 엘리엇은 오빠의 결혼과 함께 코번트리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코번트리는 그에게 생애를 관통해 이어나갈 지향점을 만들어준 중요한 장이 되었다.
코번트리에서 만난 급진적인 자유주의 사상가인 브레이 부부의 로즈힐 저택을 오가며, 저택을 찾은 당대 유럽과 미국의 개혁적인 사상가들을 대면할 기회를 얻었다. 사회학의 창시자라고 불릴 만한 허버트 스펜서나 사회 개혁가 로버트 오언, 여성으로서 사회학을 연구한 헤리엇 마티노, 미국의 초절주의 사상가 랄프 월도 에머슨이 로즈힐을 찾은 손님들이었다. 우리로서는 그들의 저작과 사회학의 역사책으로나 만날 수 있는 사상가들이 로즈힐을 채운 것이다. 시대를 끌어나가려는 에너지로 가득한 위대한 생각들이 엘리엇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엘리엇은 이 시기에 접한 독일 철학자 포이에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을 최초로 영어로 번역했다. 헤겔 좌파로 불린 포이에르바흐의 사상은 독일 사상계에서 헤겔과 마르크스 철학을 연결하는 중요한 접점이다. "기독교의 본질"에서 포이에르바흐는 신의 존재를 "인간의 내적 본성을 외부로 투사한 것"으로 보았다. 당대로서는 급진적이었던 이런 생각은 조지 엘리엇의 종교관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하다.
로즈힐에서의 장면, 장면을 상상해 보면, 조지 엘리엇의 소설 「미들마치」속 도로시아의 한마디가 문득 떠오른다. “위대한 사람들이 진리를 바라본 그 빛으로 나도 진리를 보게 될 거야. (중략) 지금 이 땅 영국에서 어떻게 위대한 삶을 추구할 수 있는지 알아야만 해.”
The Prison Courtyard (1890) Vincent van Gogh
웨스트민스터 리뷰, 사상의 편집자
무려 제레미 벤덤이 1823년 창립한 “웨스트민스터 리뷰”는 당대의 급진주의 철학과 사회 개혁 사상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계간지다. 1850년, 엘리엇과는 로즈힐에서의 인연으로 막역했던 존 채프먼이 “웨스트민스터 리뷰”를 사들이며 조지 엘리엇을 편집장의 역할로 불러들인다.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 세계에서 가장 먼저 자본주의 체제 아래의 충격적인 불평등과 인간 소외를 당면한 런던에서 만들어진 급진적 사회 개혁지의 편집자란, 당대 유럽 사회사상의 주요한 길목에 서서 유럽 사회의 미래를 만들어 나갈 위대한 생각을 편집하는 자리라 부를 만하다. 불과 서른한 살의 젊은 여성 메리언 에번스는 이 역사적인 계간지의 편집자가 되었다. 엘리엇의 경력 중 중요한 정점이 아닐 수 없다. 비록 편집장이라는 정식 직함은 채프먼의 것이었지만, 웨스트민스터 리뷰의 사실상의 편집장으로 활약했던 경력은 엘리엇 자신에게 크나큰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엘리엇의 재능과 강단이 이러한 성장을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요인이겠으나, 제인 오스틴의 시대로부터 아직 채 백 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영국 여성들이 이끌어낸 놀랄만한 변화의 파고를 체감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편집자와 번역가, 평론가로서 메리언 에번스로 활동하던 시기를 마치고, 1859년 무렵부터 드디어 소설가 조지 엘리엇의 시간이 시작된다.
The Potato Eaters (1885) Vincent van Gogh
미들마치, 비극의 어떤 형태
「Silly Novels by Lady Novelists」, 당대 여성 작가들의 웃기는, 어리석은 소설들에 관한 엘리엇의 평론이 1856년에 나왔다. “제인에어(1847)”를 쓴 샬럿 브론테나 “메리 바턴(1848)”을 남긴 엘리자베스 케스켈 등이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작가들의 리스트에 올랐다. 선량한 주인공이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괜찮은 남자를 만나 결국 행복한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소설들은 비평가 메리언 에번스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1848년 혁명, 소위 봄의 혁명(Spring of Nations)을 목도하며, 사회 개혁을 꿈꾸는 급진적 공화주의자로서, 소설 속에서마저 영국인들의 삶을 1832년의 선거법 개정 이전과 이후로 나눌 정도로 개인이 복무할 대상으로서의 “사회”라는 화두를 평생 버리지 않았던 엘리엇에게 이런 인식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의 소설을 통틀어 행복한 결혼이라는 결말을 찾기 어려운 것도, 소설을 쓰면서 필명을 조지 엘리엇으로 일관한 것도 여성이라서 제한적인 상황 아래 놓이는 것을 결단코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의 신념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조지 엘리엇이라는 필명을 사용한 까닭은 평론가이자 사상가로서의 정체성과 소설가로서의 정체성을 구분하기 위해서라는 의견도 있다. 타당한 추측이다. 시대는 이미 충분히 여성 작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적어도 조지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으로 볼 때, 작가의 성별이 주는 이미지들이 작품에 미치는 영향까지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1000페이지를 가볍게 넘기는 소설 “미들마치”는 조지 엘리엇이 창조한 세계관의 가장 정교한 버전으로 불린다. 사회적 조건의 구속 아래에서 살아가면서, 사회를 바꾸어 나가고자 하는 열린 생각을 지진 열정 넘치는 젊은 여성 도로시아가 결혼을 통해 기존의 사회망 안으로 포섭되고 마는 과정을 그린다. 그 안에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정치, 종교, 사회, 그리고 결혼과 여성의 삶이 사실적으로 담겼다. 중후반까지 한 땀 한 땀 세계관을 구성해 나가던 소설은, 급격히 스토리의 비극적인 정점으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미들마치는 우리나라에서는 널리 알려진 작품이 아니지만, 영국 소설의 계보에서 가장 중요한 걸작 중 하나로 여겨져 왔다. 영미 문학의 비평가들은 영국 소설의 계보가 제인 오스틴으로부터 조지 엘리엇, 토마스 하디, 데이비드 로렌스로 이어진다고 평가했다. 조지 엘리엇에 이르러 제인 오스틴이 창조해낸, 아직은 여전히 규방 안에 있지만 그래도 새로운 대안을 찾아나가려는 여성은, 드디어 성숙하게 인생의 비극마저도 감수하는 근대적 개인으로서의 존재성을 획득했다.
The Woman from Arles (1890), Vincent van Gogh
조지 엘리엇은 비범한 삶을 살았다.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충분히 풍족한 생활을 누렸지만, 국교를 버린 덕분에 배덕자로 그를 비난한 오빠와 의절했고, 부인이 있었던 사회개혁 사상가 조지 헨리 루이스와 오랫동안 동거하며 그의 자녀들을 부양하기도 했다. 조지 엘리엇이라는 필명은 루이스의 이름을 가져온 것이다. 루이스가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작품을 내지 못했다. 루이스와의 오랜 관계는 런던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로 여겨졌지만, 그에게 루이스는 사랑, 그 이상의 존재였던 듯싶다.
루이스가 죽은 뒤 슬픔에 잠겨있던 엘리엇은 61세의 나이에 20살 이상의 연하 존 월터 크로스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한 바로 그해에 "쇠약"으로 숨졌다. 크로스는 엘리엇을 사랑하고 동경했던 동료이자 팬이자 후학이었던가 보다. 그의 죽음 뒤 그가 남긴 작품들과 서신을 엮어 세 권의 책을 펴냈다.
나는 조지 엘리엇의 삶으로부터 강렬하지만 고요하게 지평선을 향해 멀리까지 걸어 나간 거인을 본다. 미들마치라는 작은 마을에서 지극한 현실을 직조해낸 거인의 어깨 너머로 바라본 세상은 그가 바란 대로 조금은, 바뀌었다. 아주 조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