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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커 Nov 22. 2023

제인 오스틴

이름을 찾아서, 문학편 #8 Austen X Le Brun

  여기 또 한 명의 ‘소란’을 피할 수 없는 작가가 있다. 만약 ‘작가의 계보도’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사상을 ‘이야기’의 틀 안으로 끌어들여 살아있는 인물들의 표상으로서 구현한 제인 오스틴이야말로 직계에 가까운 울스턴크래프트 사상의 계승자라고 불릴 만하다. 


  당대를 훌쩍 뛰어넘는 전복적인 사고를 숨기지 않고 본인의 삶을 통해 주저 없이 표현한 울스턴크래프트의 생각들은 제인 오스틴 소설 속 인물로 다시 태어나 오랫동안 세상과 소통했다. 이런 사회적, 정치적 ‘전복성’을 가장 있는 그대로 드러낸 오스틴의 작품은 아마도 사후 60년이 지나서야 언니 카산드라의 허락을 구해 간신히 출간된 「사랑과 우정(Love and Friendship)」일 것이다.


  제인 오스틴은 1775년에 태어났다. 울스턴크래프트가 1759년에 나서 1797년에 세상을 떠난 것을 생각한다면, 거의 동시대를 살아간 작가다. 울스턴크래프트가 사후에까지 영국과 유럽의 사상계에 미친 영향, 정치적인 흐름들에 미친 영향을 생각할 때,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 인물들이 울스턴크래프트의 영향을 드러내는 것이 놀랍지 않다. 


Julie Le Brun Looking in a Mirror (1787), Vigee Le Brun 


  무엇보다 가장 널리 사랑받아온 작품,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속 엘리자베스의 성향과 사상이나, 「이성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에서 두 명의 극히 상반되는 인물들을 통해 드러내는 이성과 감성의 균형감각에 대한 철학은 울스턴크래프트의 계승자로서의 면모를 다시 한번 상기하게 한다. 


  제인 오스틴을 「규방에 갇힌 결혼 지상주의자」 정도로 읽고 있는 이들에게 이 소식은 조금 놀라울지 모른다. 결혼제도에 관한 생각조차 수백 년을 앞서간 덕분에 온 유럽 문화계에서 도덕성의 이름으로 지탄받았던 울스턴크래프트의 전복적인 사고를 제인 오스틴이 작가로서 가장 폭넓게 수용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렇다. 제인 오스틴은 문학의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가장 많은 오해를 산 인물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사후의 예기치 않은 유명세 탓이 아니다. 삶과 작품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작가 자신의 ‘전복성’을 이해해야만 풀 수 있는 수수께끼다.      


Portrait d’une danseuse (1780-1789), Vigee Le Brun


결혼, 결혼, 결혼      


  공식적으로 출간된 그의 소설 작품이 단지 여섯 작품, 우리에게는 「레이디 수전(Lady Susan)」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사랑과 우정(Love and Friendship)」을 포함한다면 일곱 작품인지라 작품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읽기 쉬운 간결한 문장으로 위트와 아이러니를 뒤섞어 현실 속에서 반드시 존재할 듯한 인물을 구현해 내는 그의 스타일은 독자들에게는 즐거운 읽기의 만족감을 더해준다. 아쉬움이 있다면 작가 오스틴이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더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한 것뿐이다.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고른다면 단연코 ‘결혼’ 일 것이다. 가장 먼저 작가 익명(1811년 초판에서 ‘By a Lady’로 표기하여 굳이 여성 작가임은 밝힌)으로 출간된 「이성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에서 엘리너와 마리앤은 귀족 가문 출신의 여성이라 해도 결혼하지 못하면 당장 먹고사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담히 받아들인다. 결혼은 그들에게 생존의 문제다. 그런 와중에 안정적인 선택지를 버리고 존 월러비와의 열정적인 사랑에 매혹되는 동생 메리앤 대시우드의 모습은 낭만적 정서라는 것의 신기루 같은 덧없음을 그린다. 결혼은 어떤 선택이 되었건 생존의 전제 조건이다. 무엇보다 분별력 있는 결혼이야말로 극단적인 불행을 막아줄 열쇠다. 


  1813년 출간된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은 어떨까. 간단히 말해 「오만과 편견」은 엘리자베스 베넷과 피츠윌리엄 다아시가 첫 만남부터 서로를 오해해서 생긴 오랜 다툼 끝에 결국 결혼에 이른다는 이야기다. 가문의 재산을 이어받을 아들 없이, 딸만 다섯인 베넷 가문에서 딸들이 계급적 지위를 유지하고 먹고살기 위해서 ‘좋은 결혼(특히 물질적으로 안정된)’은 절대적인 과제다. 흥미롭게도 오만과 편견의 초판본에서는 작가 이름이 ‘이성과 감성을 쓴 작가(by the author of “sense and sensibility”)’로 표기되어 있다.


  이렇게만 써 놓고 보면, 제인 오스틴은 이 세계의 속물적인 결혼관을 조금의 회의도 없이 대변하는 보수적 인물로 보일 만하다. 21세기 미국의 트럼프 추종자들이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을 순수의 시대를 그리는 바이블 같은 작품으로 오독(誤讀)하고 추종하는 현상이 얼핏 이해되는 듯한 전개다. 


  18세기 후반, 19세기 초면 제국주의의 파고를 타고 대영제국의 영광이 세계의 부를 휩쓸고 있던 시기인데, 영국인의 절반인 여성들에게 결혼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중요한 것일까. 어떻게 생존의 문제조차가 된 것일까. 질문의 사회적, 경제적 배경을 이해해야만 제인 오스틴의 작품 속 「전복성」이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한다.      


Marie-Antoinette de Lorraine-Habsbourg, Queen of France, and her children (1787), Vigee Le Brun


19세기, 여전히 재산을 상속받지 못하는 여성


  제인 오스틴에게 ‘결혼’은 여성들의 지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물이다. 「오만과 편견」 속 다섯 자매는 아버지의 얼마 안 되는 재산마저 상속받을 권리가 없다. 법이 그랬다. 당시의 여성들에게 재산 상속권이나 참정권 등의 기본적인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1870년까지 관습법을 통해 부동산을 포함한 아내의 모든 재산은 남편에게 귀속되었다. 만약 부모의 유고 시 아들이 없는 집안의 경우라면, 아버지의 재산을 이어받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딸이 친척 남성과 결혼해 남편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는 것이었다. 재산이 딸들에게 가지 못하므로 친척 남성에게 상속되는 관습을 이용한 기괴한 선택이다. 


  아들이 있는 경우라면, 아들에게 모든 재산이 상속되므로 어차피 딸에게 돌아가는 몫은 없다. 다만, 아들이 상속했다면 그 재산으로 결혼하지 않은(정확히는 ‘못한’) 누이들의 생존이 위협받지 않도록 돕도록 하는 것이 하나의 사회 부조 시스템이었으니, 어떤 경우에나 여성이 누군가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제한만은 철저하게 지켜졌다. 


  더 큰 문제는 토지를 소유한 지주로서 계급적 지위와 부를 누리거나 사회의 중추를 이루는 직종에서 개인적인 경력을 쌓아갈 수 있었던 남성과 달리 여성들은 직업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길마저 제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글자 그대로 결혼해서 한 집안의 부인이 되지 않는 한, 여성에게 경제적인 자유란 불가능한 제도가 아닐 수 없다.     


Madame d’Aguesseau de Fresnes (1789), Vigee Le Brun


토지 기반 농업경제의 해체와 계급의 분열


  여성들의 재산권 제한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19세기의 영국은 드디어 토지를 기반으로 한 농업경제가 급속히 해체되며 지주계급의 몰락이 중요한 사회 문제로 등장한다. 한편에서는 상위 계층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에 몸을 떠는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하고 있었다. 울스턴크래프트가 불러일으킨 결혼제도에 대한 회의는 여성들에게는 경제적 제한에 대한 각성만큼이나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오스틴의 소설 속에서 이보다 더 익숙한 소재는 없다. 베넷 가문의 아버지는 변변한 재산도 일도 없지만 귀족으로서의 자의식만은 충실한 한량이다. 몰락해 가는 하위 지주 계급의 가부장으로서 딸들의 삶이나 가정의 운영 등에 대해서는 대체로 방치하는 무감한 태도로 살아간다. 어머니로 말하자면 귀족적 교양과는 담을 쌓고 오로지 남의 시선을 자기 삶의 지표로 삼은 채, 조금이라도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신랑감에게 딸을 결혼시켜야 한다는 속물적 의지로 가득한 인물이다. 다아시 집안의 파티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딸들이 벌이는 소동극은 귀족의 지위를 더 이상 구가하지 못하는 집안의 조바심과 분열상을 첨예하게 드러낸다. 작가의 세밀한 관찰과 비판의식으로 빚어낸 작품 속 생생한 인물들은 당대의 온갖 허위의식과 물질 지향적인 세태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결혼하지 못한 채 지역 커뮤니티의 물질적 도움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여성, 안정된 삶을 위해 표피적이고 속물적인 목사와 기꺼이 결혼하는 여성, 귀족 집안의 딸이면서도 아버지가 죽은 뒤 재산을 빼앗기고 집을 나가야 하는 여성, 여성을 대상화하고 속여서 이용하는 직업 군인 등의 인물 군상들을 통해 제인 오스틴은 여성에 대한 처우가 노예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당대의 사회 현실을 지극히 온건한 스타일로 보여준다.


Self-portrait with Her Daughter, Julie (Jeanne Julie Louise) (1786), Vigee Le Brun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효시이자 스테레오 타입처럼 보이는 제인 오스틴의 작품 속 현실은, 어디에도 없을 듯하지만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스산한 일상의 부조리들로 가득하다. 작품의 표면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부조리에 대한 격렬한 저항은 거꾸로 제인 오스틴이라는 작가가 처한 현실을 암시한다. 위악적인 여성 주인공이 살아남기 위해 온갖 비행을 저지르며 불륜을 일삼는 '레이디 수전'이 왜 작가 사후 60년이 되어서야 출간되었는지, 수전의 목소리를 통해 작가가 독자들에게 직접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제인 오스틴은 살아서 3000통의 서신을 언니 카산드라에게 보냈다. 제인에게는 영혼의 단짝이었던 카산드라를 포함해 오스틴 집안사람들은 대체로 제인 오스틴의 진면목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 것 같다. 카산드라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거의 모든 편지를 불태우고 백여 통 정도의 서신만을 남겼다. 태워진 편지, 완성되지 못한 소설, 사후 60년이 지난 뒤에 겨우 출간된 책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 있는 그대로의 제인 오스틴을 찾아가는 길은 여전히 암흑 속이다. 


  형제들 모두가 옥스퍼드를 나온 교양 있는 가족, 딸이었던 제인에게서 문재를 발견하고 직접 출판사에 원고를 들고 갈 만큼 응원했던 아버지, 살아서 그래도 조금은 작가로서의 명예를 얻었던 제인 오스틴이라는 이미지는 어쩌면 카산드라를 포함한 오스틴 가문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모른다. 그 답은, 그저 작품 속에서 추론할 뿐이다. 


  어스름한 새벽녘, 바람과 흙, 한기로 가득한 대지를, 세상의 끝애라도 도달하려는 듯 걷고 또 걸어 나간 엘리자베스의 거친 숨 속에서 오로지 제인 오스틴의 자유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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