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너를 제작하는 방법에 관심을 갖게 되니, 집안에 있는 플래너도 다르게 보였다. 제본의 방법과 커버의 종류, 속지 디자인과 종류와 같이 전에는 전혀 관심 없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샘플을 제작하기 위해서 전에 썼던 몰스킨을 분해했다. 커버를 분해해서 인쇄한 종이에 덮은 후 샘플 사진을 촬영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집에 있는 플래너를 분해하고 살펴봤다. 플래너 제작을 위해서 을지로를 돌아다니며 업체에서 받은 플래너도 모두 분해했다. 멋모르고 한 행동이지만 이렇게 하면서 플래너의 구성과 구조를 알 수 있었다.
업체 분들이 한결같이 몰스킨은 품질이 떨어진다고 왜 말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물론 몰스킨의 품질은 몰스킨을 선택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품질에 대한 생각은 상대적이다. 몰스킨 사용자들이 느끼는 몰스킨의 품질은 높을 것이다.
플래너를 잘 만들어줄 업체를 찾아야 했다. 첫번째로 한 것은 학생때 많이 활용하던 충무로 인쇄소를 찾은 것이다. 24시간 하는 업체로 유명했다. 품질이나 속도 모두 정평이 난 곳이다. 일단 가서 상담을 했다. 만족스럽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런쪽은 전문이 아닌것 같았다. 당연하다. 여기는 보통 포스터를 출력하거나, 간단한 책자 정도를 제작할때 쓰는 곳이니까.
구글에 플래너 제작, 다이어리 소량 제작과 같은 키워드로 검색을 했다. 수많은 업체가 나온다. 사이트를 돌아보며 괜찮은 업체라고 판단되면 제작을 문의했다. 답장이 온 곳은 5-6 군데. 대부분은 충무로, 을지로에 있다. 홍대나 파주에 위치한 곳도 있다. 일단 다 들러서 직접 보고 상담을 받았다. 2군데 정도가 괜찮아 보였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찾아보기로 했다. 이번에도 마음에 드는 곳이 없으면 2군데 중에서 선택하기로 했다. 언제까지 찾을 수는 없었다. 제작 기간을 고려하면 2일 이내에 결정 해야 한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질 않지만, 우연히 괜찮은 제품들이 보이는 사이트를 찾았다. 일단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이 6호선 광흥창 역 근처에 있다고 했다. 무작정 찾아갔다.
가끔은 이렇게 일단 찾아가는 것이 답이된다. 이렇게 찾은 곳은 기린팩토리의 제품 창고 같은 곳이었다. 대표님이 혼자서 바쁘게 작업을 하고 계셨다. 지하에 있는 그 공간이 내눈에는 보물 창고 처럼 보였다. 다양한 재질의 종이와 커버, 가죽들이 산더미 처럼 쌓여 있었다. 대표님은 처음에는 나를 불신의 눈으로 반기셨다.
이렇게 만난 대표님은 지금은 내가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 분이다. 소량 (2021년 3분기는 완전히 망했다. 그래서 100권 밖에 제작하지 못했다)을 제작해도 기꺼이 해주신다. 다른 업체에서는 절대 해주지 않는 수량과 금액임에도 해주셔서 항상 죄송하고 감사하다. 덕분에 나는 제작에 대한 걱정은 모두 덜 수 있었다.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행운이다. 그만큼 브랜드 가치와 철학, 전략에 더욱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든 것이라는 말이있다. 대표님과의 만남은 나에게 이 말을 곱씹게 했다. 플래너 제작과 품질은 믿고 맡길 수 있는 분이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그리고 그 행운은 일단 부딛혀서 만나야 찾아온다. 결국 나 혼자서 하는 것은 없다.
플래너 제작은 시작했다. 약 3주가 걸릴 예정이다. 이제 패키지 제작이 필요했다. 꿈은 애플 같은 패키지 였다.
현실은 냉혹하다. 집에 있는 애플 상자를 들고 패키지 회사를 찾아 돌아 다녔다. 대부분의 패키지 제작 회사는 을지로 방산시장 근처에 몰려있다. 예전에는 관심도 없던 그 곳 역시 보물창고였다. 문제는 내가 그리는 패키지는 최소 제작 수량과 단가 자체가 비쌌다. 제작 기간도 맞추기 어려웠다.
간과한 문제는 또 있었다. 플래너는 배송상품이다. 오프라인에서 구입해서 직접 가져가는 것과 다르다. 배송중에는 손상이 있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손상을 최소화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난 이런 부분은 생각하지 않았다.
패키지 선정을 위해서 몇일을 고민했다. 배송의 문제와 현실의 한계를 고려했다. 안전봉투를 선택했다. 대신 안전봉투에 BLOCK 로고를 넣어 디자인을 하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몰스킨을 구입하면 종이 포켓에 수많은 언어로 쓰인 작은 설명서를 만날 수 있다. 몰스킨 브랜드 스토리가 적혀있다. 종이 포켓이 넣고 다니다가 가끔씩 꺼내본다. 나도 모르게 몰스킨의 브랜드에 빠진다. 그들의 스토리에 빠진다. 그렇게 10년째 몰스킨만 찾게 됐다. 나도 모르게 몰스킨이란 브랜드의 팬이 되버렸다.
포켓 설명서는 꼭 제작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부담스럽지 않다. 종이 포켓에 넣고 언제든지 필요하면 꺼내볼 수 있다. 고객이 원하면 보는 것이다. 원하지 않으면 버려도 된다. 하지만 대부분은 포켓에 그대로 넣고 다닐 것이다. 그러다 가끔 생각나거나, 설명이 필요할때 꺼내보게 될 것이다. 이런 과정을 상상하면 제작이 급하더라도 꼭 만들어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몰스킨처럼 길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우선은 A4용지를 가로로 2등분한 정도로 생각했다. 가로 29.7cm X 세로 14cm 정도. 이렇게 하면 우선 제작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 A4용지에 인쇄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인쇄된 포켓 설명서를 4단으로 접는다. 포켓에 넣는다.
포켓 설명서와 함께 감사 엽서도 제작했다. 사실 이 두개는 없어도 될지 모른다. 하지만 난 이 두개가 BLOCK 플래너를 차별화 시켜줄 요소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고객이 제품을 받고 열어봤을때, 진심이 담긴 감사 엽서와 브랜드 소개가 담긴 설명서는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플래너 제작도 촉박한 상황에서 감사 엽서까지 제작하는 것은 쉽지는 않다. 이게 의미가 있을까. 라는 고민도 하게된다. 정말 막판에 모든 일정은 정신없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도 꼭 제작하고 싶었다. 단 한분이라도 이 엽서를 받고 기분이 좋아진다면 의미가 있다.
그런데 급하게 제작하면서 첫번째 감사 엽서는 이도저도 아닌 면이 없지 않다. 이후에는 보다 진심을 담은 내용을 담기 위해서 고민하고, 수정해 나가고 있다. 물론 여전히 부족하다. 하지만 계속 발전해 나갈 것이다. 감사 엽서를 보기위해서 블록 플래너를 구입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