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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연 Sep 08. 2023

편의점 음식의 gram

소식좌 사회생활백서


“봤어? 전혀 새로운 그램.
내 그램은 스타일도, 감성도 보기 좋게 빛난다
보기 좋게 해낸다.
처음 보는 스타일, 처음 보는 퍼포먼스 L*, 그램.”



 그램을 말하자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L사의 그램이라는 노트북이다. 이 광고 카피를 조금 내 이야기로 바꿔보자면 이렇다.


 “봤어? 전혀 새로운 그램. 내 몸무게도, 강박도 보기 좋게 빛난다. 보기 좋게 해낸다. 처음 보는 인간형, 처음 보는 실제상황 이수연, 그램.”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선 나의 강박적인 식생활을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아무래도 이런 카피로 광고를 돌린다면 너무나 불친절할 테니까. 내게 인텔이나 16 GIGA 렘 같이 스펙을 쭉 보여줄 수도 없으니까(인바디라면 모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모든 편의점 음식의 ‘gram’ 수를 확인했다. 내가 편의점 음식을 고르는 기준은 다름 아닌 ‘gram’이었다.


강박이 된 습관


 언제부터 이 습관이 생겼는지는 까마득하다. 다만 체중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나는 칼로리 계산법을 믿지 않게 되었다. ‘칼로리가 높은 음식을 먹으면 살이 찐다’라는 이야기는 그다지 내게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왜냐면 ‘질량보존의 법칙’이 있으니까. 깊게 들어가자면 화학반응부터 시작해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겠지만, 내게 ‘질량보존의 법칙’은 간단했다.


‘200g을 섭취하면 아무리 다 살로 가도 200g을 넘을 수 없다.’


 

 그렇다. 우리는 200g을 섭취했는데 250g이 찔 수 없다. 과학적인지 아닌지를 따지지 말고 일단 들어봤으면 좋겠다. 나름의 논리를 펼쳐보자면 정해진 기본 체중(공복상태)에서 200g을 섭취한 뒤 체중을 재면 딱 200g이 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00g을 넘는다면 물이나 액체를 마신 경우다. 그러니까 섭취한 모든 것이 살로 가도 200g의 음식은 아무리 쪄봐야 200g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나름대로 ‘질량보존의 법칙’이라 말했다. 그 이상은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을.


 물론 여기에는 ‘소화’가 제외되어 있었다. 소화가 되면서 200g을 섭취해도 분해되고 배출되어 10g만 내 몸에 남을 수 있다. 하지만 체중 강박이 있는 나는 소화가 되기 전, 미친 듯이 체중을 쟀다. 몸에서 분해되고 흡수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몇 ‘g’이 늘었는지가 먼저였다. 그러니 ‘허용 가능’한 몸무게를 유지하기 위해선 제한된 g을 섭취해야 했다. 먹자마자 체중을 재도 심리적인 안정을 가질 수 있게. 아아아. 조금 내가 이상한 것 같은데. 강박인지라 쉽게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래서 내 병명 중 ‘식이장애’가 있었던 걸까(강박 장애라고 하지 않아 다행인가).


모든 것의 기준, gram


 어쨌든 이런 나는 편의점에서 먹을거리를 구입할 때 반드시 g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다. 내가 한 끼에 허용할 수 있는 g 수는 500g 미만. 햇반 하나가 210g이니, 햇반 하나에 반찬 두어 개를 추가하면 약 500g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남들이 “가볍게 먹자!”라고 말하는 것 또한 내겐 g으로 계산됐다. 내게 가벼운 식사는 300g이었다. 편의점 햇반 작은 죽 한 그릇이 287g이니, 내게 가벼운 식사라 하면 아무런 반찬 없이 편의점 죽을 먹는 정도라고 가늠할 수 있었다.

 이 ‘gram’ 식사는 일상에서 종종 기세를 드러냈다. 요리를 못 하는 탓에 식사는 대부분 배달이 아니면 편의점에서 해결하게 되는데, 끼니를 때우기 위해 편의점에 가면 나도 모르게 모든 음식의 g을 확인하고 있었다. 삼각김밥 작은 건 100g, 중간은 130g, 큰 건 150g... 편의점마다 g 수는 다르지만, 대충 g을 보고 뭘로 할지 정했다. 편의점 메추리 쏙쏙은 25g. 반찬으로 적합하다. 연두부는 118g. 500g을 먹는다 치면 허용 가능 범위다. 이렇게 500g 미만으로 편의점 음식을 고르고 계산했다. 계산대에 음식을 올려놓을 때면 전체 몇 g인지 세고 있는 나를 볼 수 있었다.


“칼로리랑 영양소가 중요하죠.”



 아무래도 이 행동은 좀 눈에 띄다 보니 내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한 마디씩 했다. 중요한 것은 영양소와 칼로리라고. 그간의 나 역시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모르는 건 아닌데 자꾸만 몸이, 생각이 명령을 내렸다. 500g 이상 먹으면 안 된다고. 이걸 다 먹고 체중계에 오르면 또 좌절할 거라고. 강박이 강박을 부른다고 해야 할까. 체중 강박은 어느새 내 식생활까지 깊이 파고들었다는 걸 느꼈다. 매번 편의점에 들어서 g 수를 확인할 때마다.


내가 이상한가?


 조금이나마 자기인지를 하게 된 계기는 TV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인간극장에서 식이장애를 겪는 사람의 이야기를 보게 된 것이다. 모든 식사에 g 수를 맞추는 모습과 먹고 싶지만 먹을 수 없어 음식을 수집하는 모습. 먹으면 꼭 정해진 시간만큼 운동을 하는 모습. TV에 나온 인물은 음식을 먹기 전, 반드시 gram을 확인했다. 한 끼도, 작은 간식도 놓치지 않고.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댓글을 달았다. 나는 홀로 심각했다. 남 일이 아니었다. 내 모습도 그랬다. 아무리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니라 해도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니까. 그래야 먹을 수 있으니까.

 인간극장 특유의 차분한 나레이션이 나올 때에 나는 흔들렸다. 내 모습이 그렇게 심각했던 걸까? 문제인 걸까? 진짜 강박이고 식이장애였던 걸까? 이 불안한 내 마음이, 온갖 g을 확인하는 내 행동이 인간극장에 나올법한 얘기인 걸까?


 ‘아니,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야.’


 그때는 그렇게 넘어가려 했다. 몸이 아픈 것도, 음식을 더 먹이는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냥 남들보다 좀 더 신경 쓴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결국 내게 진단이 내려졌다. ‘강박적 식이장애’. 그 병명은 공황장애와 우울증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내 속에서 쑥쑥 자라왔던 거였다.






이 매거진은 주 2~3회 연재 이후 브런치북으로 전환됩니다.

식이장애 이야기 이후 소식에 관련된 이야기 / 소식좌 사회생활 꿀팁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작가소개 : 이수연

남들보다 '덜' 먹는 사람.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더 먹어"였다. 성인이 되어 우울증과 함께 공황장애, 식이장애를 앓았으며 정신병원에 입원해서도 "더 드세요"를 가장 많이 들었다. 지금은 식이장애를 극복하고 건강한 식생활을 위해 소식좌로 살아가고 있다. <조금 우울하지만, 보통 사람입니다> 등을 썼다.


Insta @suyeon_lee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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