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늘윤
손-. 던져진 낱말에 물밀듯 떠오른 건 ‘아담의 창조(천지창조)’였다. 창조의 찰나, 닿을락 말락 한 하느님과 아담의 손끝. 수십 수백 번 변주되고 재생산돼 누구든 한 번쯤 봤을 그 손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두 손은, 양극단인 종교와 육신 모두를 매료해 각각의 해석을 끌어냈다. 가톨릭은 그림 속 조물주가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했다. 반면 해부학은 미켈란젤로가 하느님과 케루빔으로 뇌 단면을 표현했으며, 생명 아닌 지성을 아담에게 부여했다고 보았다. 생명과 지성. 꼭 르네상스 전후를 보듯 완연히 다른 세계관이지만, 대척점에 선 둘에게도 중력 같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상위 존재가 하위 존재를 창조했다는 수직성이다.
작품명 아담의 ‘창조’로 회귀하는 두 손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숨 거둔 미켈란젤로에게 물어볼 수 없으니, 풀이하는 건 살아있는 우리의 몫일 테다. 나는 맞잡지 못하고 높낮이를 둔 두 손에서 창조의 수직성을 보았다. 창조. 맑스 왈 인간의 유적 본질이라더니 아담의 후손인 우리 모두(필자는 무교다) 설렐 수밖에 없는 단어다. 이 가슴 떨리는 ‘창조’를 쟁취하고자 미학이든 과학이든 지금껏 달려오지 않았나. 그것에 숨은 고루한 수직성이 인류세에 독이 됐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수많은 경외와 경이를 쟁취한 우리는 점점 신에 가까워지고 있다. 인공 생명체, 유전자 조작은 물론 앉은 자리에서 자그만 액정 화면을 통해 세상을 내다볼 수도 있다. 이렇듯 창조의 발전은 동굴에서 살던 인간이 더 다양한 것을 손에 쥐고 훨씬 넓게 세상을 빚도록 했다. 하지만 우리가 꿈꾸던 신은 힌두의 시바 신이었는지, 많은 것들이 창조와 동시에 스러졌고 사라지고 있다. 파괴의 그늘은 ‘인류세’로 이름 붙여져, 인간이 기술로 지구를 구원하리라는 낙관 혹은 대멸종을 피할 수 없다는 냉소로 묻힐 뿐이다.
양성적 피드백만 허구한 시대. 창조의 독주를 뒤집을 새로운 길은 없을까? 인류세 문제를 포착한 과학학자이자 문화비평가 도나 해러웨이는 기로에 선 우리에게 ‘쑬루세(Chthulucene)’를 제안한다. 쑬루세란 그리스 신화 속 땅속에 사는 존재들인 ‘Chthulu’와 시대를 뜻하는 ‘cene’의 합성어이다. 쑬루세에선 고루한 위계적 지배 대신, 모든 땅속 존재들이 그물망처럼 얽혀 현재 진행 중인 시간을 살아간다. 촉수 같은 그물망 속에선 그 누구/무엇도 전적으로 수동적이지 않다. ‘실뜨기’라 칭해지는, 작용하고 그 작용을 받는 역동적 패턴이 연속될 뿐이다. 이러한 릴레이는 현재를 구성하고 열린 결말로 계속해서 이어진다. ‘인류멸망 시나리오’니, ‘지구 종말 시계’니-. 공포뿐인 비상선언 아래서 인간이 구원자를 자칭하거나 자조하는 ‘닫힌 결말’ 인류세와 완전히 다른 시간성이다.
땅의 모든 것과 촉수처럼 연결돼 이어지는 쑬루세. 해러웨이는 쑬루세를 소개하며 인류세를 꾸려온 인간만이 지구의 유일하고도 중요한 행위자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는 모든 생물과 비생물이 공-산(共-産, 함께 만듦)하는 시대, 인간만의 폴리스(Polis, 공동체 국가)가 아닌 테라(terra-, 땅)폴리스 쑬루세야말로 현대의 파괴적 세태에 진정 응답할 수 있노라 강조한다. 내 곁의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 반려동물에서 동물권으로. 일상에서 세계로 연결돼 확장된 폴리스를 걷는 자들이 그렇다. 열매를 먹고 씨앗을 퍼뜨려온, 동물 인간과 나무의 오랜 관계를 떠올려보라. 유구히 그래왔던, 하지만 우리에게 새롭기만 한 관계성 쑬루세는 오래된 천장화의 이미지를 바꿔놓는다.
‘아담의 창조’에서 손끝은 맞닿지 못한 채 찰나로 끝났다. 만일 천재 미켈란젤로가 오늘날까지 살아있었다면, 그림의 수직성을 지우고 두 손을 지긋이 맞대게 했을지 모를 일이다. 또 생명이든 지성이든, 그것을 지닌 건 신이 된 아담만이 아니라고 덧붙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손을 내밀다’라는 관용어처럼 손에 쥔 도구를 놓고 지구의 모든 파트너와 함께해야 할 때 아닐까. 수평에서 손을 맞잡고 오래도록 함께 뒹구는 힘. 모두가 에덴인 쑬루세를 꿈꾸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