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e far away
어찌할 도리 없이 무력한 계절
6월, 여름의 시작과 함께 책장의 묵혀둔 책을 펼쳐 들었다.
표지에 뽀얀 분홍 복숭아가 그려진 '여름의 맛'
읽는 둥 마는 둥 하며 눅진해진 맥주잔 근처 어딘가에 여름 내내 펼쳐두는 계절 소품 같은 책이기도 하다.
나는 여름을 사랑한다.
여름을 사랑하는 이유라면 여름의 팔딱거리는 생명력... 뭐 그런 것은 아니고, 단지 여름이 주는 어찌할 도리 없이 무력한 그 느낌이 어릴 때부터 좋았다고 할 수 있겠다.
동네의 또래 아이들과 숲으로 몰려들어가 작은 초식 동물처럼 뛰어다니며 하루 종일 여름 버찌, 뱀딸기 같은 산열매를 따먹고 해가 어스름해지는 해 질 녘에 마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고아처럼 땀과 새까만 열매즙으로 뒤범벅이 된 채 마을로 내려와 어른들을 기함하게 만들었던 나의 눅진하고 달큰했던 어린 여름날들.
선풍기로 견딜 수 없는 본격 무더위가 시작되면 나는 오전부터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동네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유독 여름에 강렬하게 느껴지는 나른한 책 곰팡이 냄새가 나는 책에 기대어 낮잠을 자다가 지하 매점에서 파는 시원한 국수를 먹고 책을 몇 권 안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무더워지면 입맛이 없어 밥은 멀리했지만, 말라빠진 유부와 오이 고명이 올라간 어딘가 부실해 보이는 도서관 매점 국수만은 꾸역꾸역 잘도 먹었다. 도서관에서 영양가 없게 여름을 나는 인간답게 나의 몸은 언제나 조금 서늘했고 국수 위에 올려진 마른 유부처럼 유분기가 쏙 빠져 있었던 나른하고 깡마른 소녀의 여름날들.
서핑을 위해 예약해둔 바다로 가는 기차를 잠으로 놓치고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 바람이 훌렁훌렁 잘 통하는 원피스와 맨발에 슬리퍼를 꿰어 신고 나가 동네 주민을 불러 망원동 골목 작은 비스트로에서 맥주를 마시는 계획 없이 느슨한 여름날들.
나의 여름은 언제나 계획이 없었고 무력감으로 몸이 둥둥 떠있는 것 같았는데, 바로 그 느낌들이 좋았던 것이다.
'여름의 수직선에서', '그린 파파야 향기', '수자쿠', '카페 뤼미에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나의 여름은 언제나 이곳이 아닌 아마득하게 먼 무력한 감각의 여름 영화 속 장면에 존재하기도 했다.
긴 낮잠에서 깨어나 목 뒤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쓰윽 닦아내고, 얼음이 녹아 주변에 물이 흥건해진 유리잔을 들어 올리는 나른한 감각의 여름이.
여름이 오면 몇 해는 이 무력함을 최대로 즐길 수 있는 교토로 향했다.
유명한 절이나 관광 스팟이 멀어 관광객의 발길이 뜸한 작은 동네의 숙소에 짐을 풀면서 시작되는 여름 여행들이었다.
해가 가장 높이 뜬 시간에 바싹 마른 풀냄새가 진동하는 다다미가 깔린 찻집에 들어가 따뜻한 차 한잔과 깍둑 썰기한 우뭇가사리 묵, 과일, 단팥, 아이스크림이 들어간 다디단 '앙미츠'를 번갈아가며 입속으로 밀어 넣는 게 전부인 다소 게으른 오후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 샤워를 하고 짧은 낮잠에 들었다.
내 익숙한 집이 아닌 가볍고 보송보송한 손님용 이불이 있는 잠깐 빌린 방에 씻고 누우면 금세 까무룩 하게 잠이 들어버리곤 했다.
해가 지면기 시작하면 두어 시간의 달콤한 낮잠에서 깨어 카모가와 강변으로 나와 걸었다.
낮동안 뜨겁게 달궈진 분지 형태의 옛 도시는 해가 지고 선선한 바람이 강가에 불어와도 쉽게 식지 않아서, 불을 밝힌 '쿠시야키 집'에 들어가 시원한 생맥주로 또다시 달아오른 몸의 열을 식혀야 했던 교토 여행, 그 이국의 초록 짙고 고요한 여름날들.
여름을 알리는 물컹하고 달큰한 납작 복숭아
이곳 체코의 여름은 상상하던 것보다 좀 더 경쾌하고도 나른한 느낌이다.
광장에 내어놓은 카페테라스에서 오전부터 맥주잔을 앞에 놓고 앉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이기 시작하면 바야흐로 이곳의 여름이 시작된다.
그리고 길어진 여름 해 때문에 밤 9시가 다 되어가도 대낮처럼 밝아 카페테라스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쉽사리 엉덩이를 들지 않는다.
수다는 엉덩이 쪽보다 조금 더 무거워 밤이 늦도록 그 속도 빠른 체코 말 수다가 광장에 그칠 줄을 모르고, 광장에 면한 가정집들에 불이 다 꺼지도록 희미하게 들려오곤 한다.
이곳의 여름은 과연 맥주의 나라답게 가벼운 모닝 맥주로 시작해 맥주로 하루가 마감되는 셈이다.
그리고 '납작 복숭아'가 마트에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이곳 여름의 도래를 알리는 알림이다.
장바구니에 달큰한 여름 향이 진동을 하네.
얼른 집으로 가서 깨끗이 털을 씻어내고 한입 통째로 베어 물어야지, 상상만으로도 벌써 입안이 달큼해진다.
츱츱 츄릅-
달큼한 과즙을 뚝뚝 흘려가며 여름 과일을 먹는 일은 세상 부끄러우면서도 경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알 수 없는 서글픈 장면이기도 한 것이 내가 사랑하는 계절, 이 여름의 아이러니.
입술에서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 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습니다
- 박준 '환절기'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끝나간다는 느낌 때문일까, 여름은 내가 가장 사랑하면서도 싫어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여름방학이 끝나가는 그 밑도 끝도 없는 쓸쓸함이야말로 인간이 가지는 지나간 찬란했던 여름날에 대한 노스탤지어일까.
이곳의 여름은 한국보다는 한 발짝 정도 더디어 이제야 시작이다.
옆집 화단의 레드커런트가 무섭게 붉어지고, 체리도 점점 검붉어지면 여름이 짙어갈 것이다.
그리고 테라스에 앉아서 그린 비어를 마실 수 있는 여름이다.
어떤 원리로 녹색이 된 맥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눈에 싱그러운 푸르름을 담아 마시는 여름의 맛!
좋아하는 여름 냄새 가득한 시의 구절을 읊어보며 오늘도 맥주를 마시는, 내가 좋아하는 여름이 시작된다. 얏호:)
동해여, 오늘 밤은 이렇게 무더워 나는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거리를 거닙네.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거리를 거닐면 어데서 닉닉한 비릿한 짠물 내음새 풍겨 오는데
- 백석 '동해'
https://youtu.be/SbPuqXDV77I?feature=sha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