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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눅눅 Mar 19. 2024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못내 나를 사랑하지는 못했다(4)

공포형-회피애착 유형의 연애 에세이

공포형-회피애착 유형의 연애 에세이

타임머신




남자친구는 술을 절대 하지 않는다. 않는다기보다는, 못한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몸에 받지도 않고. 그와 반대로 나는 한때 주변에서 알콜 중독을 걱정할 정도로 애주가다. 한창 마실 때에는 매일 혼자서 안주에 맥주 피쳐 2개를, 아니면 소주 한 병을 마시고도 멀쩡하게 뒷정리까지 다 하고 깔끔하게 잠들 정도였다.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나에게는 금주령이 내려졌다. 사실상 선생님은 '술을 마신 날에는 저녁약을 먹지 않아야 해요'라고 했지만, 엄마와 남자친구가 술을 금지한 것과 같았다. 공황장애 초기에는 메스꺼움과 구역질 때문에 술은 물론이오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했으니 금주령을 지킬래야 지킬 수밖에 없었지만, 슬슬 약을 먹으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가 호전되었을 때에 근질근질하게 술이 고프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괜찮다는 반쯤의 거짓말을 하며 한 두 잔, 저녁 식사에 반주를 시작한 이후로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나는 저녁약을 하루도 먹지 못할 만큼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아마도 정신과 약을 먹고 두 세달 즈음이었을 거다, 나는 그때 내가 약을 다 먹고 나은 줄 알았다.


정확히 기억난다. 내가 술을 처음 마시기 시작했던 날이. 술자리나 가족과의 식사 자리가 아닌, 본격적으로 내 방 문을 닫고 혼자서 노트북을 켜놓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던 날이. 그건 2019년 어느 여름날이었다. 아직 우리가 세 식구였을 때. 나는 방문을 닫고 혼자서 500미리 네 캔을 비웠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더 이상 술을 찾을 수 없게 되자, 더 마시기 위해 집 앞 편의점으로 나가기 위해 슬리퍼를 막 신었을 때. 귀신같이 어릴 적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운동화를 신었어야지!'


아주 어렸을 적,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도 가기 전. 우리 가족은 화목과 살벌, 두 극단을 사이로 줄타기를 하던 집안이었다. 그 저녁도 그랬다. 많이 덥지는 않았던 여름날이었다. 엄마가 저녁상을 차렸고, 셋이 함께 저녁을 먹고. 어렸던 나는 장난을 치며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었고. 기분이 좋아진 두 사람은 술잔을 기울였고, 빈 피처가 하나 둘 늘어갈 즈음에. 갑자기 손바닥 뒤집히듯 언성이 높아졌다. 여기까지는 다른 평범한 집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일은, 분명 흔하지는 않을 테다.


접시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잠결에 놀라서 방에서 나왔다. 유리컵도 깨져있다. 떨어뜨렸을 수도 있지. 아니, 던졌구나. 화가 나면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지. 하지만 조금은 무서운걸. 오금이 저릿저릿, 손발에 땀이 축축. 언성이 높아지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어린 아이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눈치 보기 바빴던 나는 이 폭풍이 언제쯤 잠잠해질까 숨죽이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아빠가 서재 방으로 갔다. 칼 손잡이를 움켜잡고, 뾰족한 칼끝으로 창문을 마구 긁으며 유리를 깨려고 했다. 그런 아빠를 말리는 와중에 엄마의 발에 유리조각이 박혔다. 엄마 발에서 피가 났다. 아, 여기서부터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어느 순간 아빠는 내복바람이었던 내게 '옷 입어!' 소리질렀다. 눈물콧물이 된 채로 나는 허둥지둥 내복을 벗고 분홍색 상하의 체육복 세트를 입었다. 옷 입기가 더딘 내게 아빠는 '빨리 갈아입어!' 소리쳤고, 그 와중에 엄마는 '애를 어디로 데리고 가려고!'하며 화를 냈다.


옷을 다 갈아입었다. 아빠는 이미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고 있는 상태였다. 내 팔을 세게 잡아당기는 엄마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기억이 났다. 엄마는 많이 취해 있었다. 엄마가 나를 세게 붙잡고 있는 것이 너무 아프고, 무서웠다. 나는 엄마를 뿌리치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현관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고 자주 신었던 슬리퍼가 있었다. 슬리퍼를 신자마자 아빠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빠는 내 손목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소리를 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기억이 난다. 엄마는 울부짖었다. 아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를 잡아당기며 빠르게 뛰었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아빠에게 붙들려 따라 뛰었다. 그 때, 갑자기 내 발에서 슬리퍼가 벗겨졌다. 단숨에 맨발이 된 나는 아빠를 불러 멈춰세웠고, 아빠는 내 뒤로 길거리에 덩그러니 떨어진 슬리퍼 두 짝을 보고 화를 냈다.


"뛰어야 하는데 왜 슬리퍼를 신었어? 운동화를 신었어야지!"


나는 허둥지둥 돌아가 다시 발에 슬리퍼를 끼워넣었다. 다시는 슬리퍼가 벗겨지지 않게 발에 힘을 세게 주었다. 아빠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아빠의 뒤를 따라 나도 뛰었다. 조금은 눈에 익은 동네가 보였다. 얼마 뛰지 않았는데, 아빠는 벌써 걸음을 멈췄다. 외할머니 집 앞이었다. 아빠는 초인종을 눌렀다. 늦은 밤이었다. 아마 자정이 지난, 새벽이었던 것 같다. 아빠와 내가 뛸 때 거리가 정말 조용했었으니까. 아빠와 내가 뛰는 소리밖에, 숨이 차 헐떡거리는 내 얕은 숨소리와, 내 슬리퍼가 바닥에 부딪쳐 파닥대는 소리가 정말 크게 들렸으니까.


두 번, 아니, 아마도 세 번. 아빠는 초인종을 계속해서 눌렀다. 한참이나 답이 없던 초인종에, 철문은 열리지 않고 그 대신 안쪽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외할머니가 계단에서 내려왔다. 굳게 닫힌 철문을 사이에 두고, 할머니는 아빠와 나를 차례로 쳐다보았다. 아빠가 그랬다.


"00이 당분간 여기서 재우겠습니다."


할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애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게, 0서방."


그 한마디를 끝으로 할머니는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멍하니 아빠를 올려다 보았다. 그때 아빠의 표정이 어땠는지,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탁, 탁, 탁. 슬리퍼가 길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천천히 울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빠는 더 이상 나를 데리고 뛰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동네 경찰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무서워서 아빠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아빠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미친듯이 뛰어왔던 길을 되돌아 아주 느릿하게. 엄마가 남아있는 집으로 걸어갔다.




'......'


술을 더 사러 가기 위해 슬리퍼를 신었을 뿐이다. 흔하지는 않지만 다른 집 애들도 겪었을지 모르는 옛날 일이 기억났을 뿐이다. 이제는 이름 모를 공포 영화처럼 느껴지는 그 끔찍한 여름날의 기억이 되살아났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내 세상은 다시금 무너져내리는 걸까. 분명 다 잊어버렸다고, 다 큰 나는 이제 그런 기억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나이가 먹은 만큼 이제는 단단해졌고 흔들리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두 사람을 많이 닮았다. 끔찍이도 술을 마시니까. 2019년의 여름도, 그 다음해도, 그 다음다음해도, 계속, 심지어는 공황장애 진단을 받고 난 이후에도. 술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술에 취해 현실이 멀게 느껴지는 게 좋아서. 내 삶을 뒤로하고 술에 취해 있는 느낌이 좋아서. 술에 취하면 나는 내가 아니게 되니까. 술에 취하면 울어도 되고, 소리 질러도 되고, 화내도 되니까.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잠들어버려도 되니까.


다시,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하고 두 세달 즈음이 지나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다 나은 줄 알았다. 더 이상 죽을 것처럼 무섭지도 않았고, 갑자기 불안해서 죽고 싶어지지도 않았고, 돌연 누가 나를 죽이러 올 것 같은 느낌도 안 들었으니까. 그래서 내 멋대로 약을 멈추고 술을 마셨다. 물론 남자친구에게는 비밀이었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정신과 약은 절대로 환자 마음대로 끊으면 안 된다.

내멋대로 약을 끊은 지 일주일 차, 나는 너무나도 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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