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형-회피애착 유형의 연애 에세이
죽고 싶은 기분은 당연한 거야
공황장애를 비롯한 정신과 진단을 받은 건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약을 막 먹기 시작했을 당시만 해도 남자친구는 나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고 있었다. 늘 밝은 얼굴로 데이트를 마친 내가 집에 들어와서는 방문을 닫고 스스로 목을 조르며 운다는 것을 남자친구는 알 리가 없었다. 살이 찌는 것이 무서워 단지 체했다는 이유를 핑계로 억지로 손가락을 목구멍에 욱여넣고 하루 동안 먹은 것을 밤새 토해낸다는 것도. 아마 내가 말하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남자친구는 몰라야 했다. 내 우울이, 내 불안감이, 내 공황발작이 얼마나 심한 정도인지 그가 몰랐으면 했다. 그래서 병원도 철저하게 혼자서 다녔다. 엄마가 데려다주는 것은 병원 건물 앞까지만. 늘 병원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건 나 혼자였다. 혼자이고 싶었다.
정신의학과에 들어가면 다양한 유형의 사람이 보인다. 마스크와 모자, 펑퍼짐한 옷차림으로 존재 자체를 꽁꽁 가린 사람, 눈에 띄다 못해 그 사람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화려한 옷과 화장으로 치장을 한 사람, 보호자를 대동한 사람, 혼자 온 사람, 구석 자리에 앉는 사람, 창가 자리에 앉는 사람, 카운터에서 간호사와 싸우는 사람, 울면서 상담실에서 나오는 사람 등등등.
그들 사이에서 나는 딱 적당한 영역에 있었다. 장례식장에 가는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펑퍼짐한 검은 옷을 입고 갈 때도 있었고, 기분이 좋으면 데이트를 나가는 것처럼 꾸미고 갈 때도 있었다. 간호사와는 방문 예약을 할 때나 진료비를 낼 때 이외에는 일절 말을 걸지 않고, 혼자 와서 구석의 창가 자리에 앉았다. 상담실에서 나올 때는 울면서 나올 때도 있었고, 울음을 그치고 나올 때도 있었다. 이런 나의 모습조차도 누군가에게는 눈에 띄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내가 처음으로 보호자를 대동해서 병원에 가게 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남자친구를, 아직 미래에 관계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을 내 보호자로 데리고 병원에 가게 되었다는 거다. 긴장을 잔뜩 한 나는 내가 생각하는 선에서 '최대한 정상인스럽게', 그러니까, 우울해보이거나 불안해보이거나 공황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해서 내 겉모습을 꾸몄다. 어릴 때부터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이라는 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웠지만, 세상은 늘 내가 배운 것과는 다르게 흘러갔으니까. 단정한 투피스 세트에 구두, 안색을 밝혀주는 화장까지, 당장 목적지를 카페로 틀어도 될 정도의 차림새를 하고 나는 남자친구의 차에 올라탔다. 남자친구는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없이 출발했다.
병원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버스로는 삼십 여 분이 걸리지만 차로는 십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명확히 말해서 우리 동네는 아니었고, 옆옆동네 정도 되는 곳이었다. 내가 사는 곳에 정신의학과가 있었더라도 나는 분명 옆옆동네까지 넘어가야 하는 곳에 있는 정신의학과에 내 정보를 등록했을 거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전염병에 걸린 것처럼 내 병을 사람들로부터 숨기고 싶었다.
"꼭 같이 안 올라가도 돼."
병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차에서 내리기 전에 나는 마지막으로 남자친구를 설득했다. 사실 설득보다는 애원에 가까웠다. 진료 기다리고 상담까지 하고 나오면 시간 많이 걸려, 병원에서 가만히 있으면 심심하잖아. 근처 카페에 있으면 내가 끝나고 그쪽으로 갈게. 혼자 다녀올게. 걱정할 거 하나 없어.
"내가 같이 가면 안 되는 이유가 뭐야?"
열심히 '너와 병원을 같이 가면 안 되는 이유'를 늘어놓고 있는 내게 남자친구는 물었고, 그 물음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런저런 것들을 다 제치고, 가장 큰 이유는 명확했다. 쪽팔려서. 남자친구를 데리고 병원에 가게 되면, 이제 정말 나는 그에게 정신병을 가진 여자친구로 확정이 되어버리니까.
'나 요즘 좀 우울한 것 같아서 정신의학과 다녀보려고. 약 몇 알 먹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더라.'
이 말을 전해듣는 것과, 직접 병원에 가서 진료를 기다리고 상담을 받고 나와 약 조제를 기다리고 약을 처방받아 나오기까지 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분명, 다르게 느껴질 테였다. 그 누구보다 평범한 여자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나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평소와 다르지 않게, 나는 차분히 진료 예약을 하고 구석 자리에 가서 앉았다. 남자친구는 내 침묵을 살피며 조용히 옆에 앉아 있어 주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서, 나는 프론트에서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손톱 거스러미에 열중하는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운명의 순간처럼, 내 이름이 불렸다.
"000님,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료실로 향했다. 남자친구로부터 도망치듯이 진료실로 들어간 셈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영원할 것 같은 안정을 되찾았다. 정말 아팠다가도 병원에만 가면 거짓말처럼 몸이 괜찮아지는 것처럼, 문을 열고 들어오기 직전까지도 불안했던 내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의 진료는 즉, 내과나 정형외과같은 신체에 대한 직관적인 데이터에 따른 진찰보다는 나와 선생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통해 행해진다. 그 말은, 내가 이번 주 내내 상태가 전혀 괜찮지 않음에도 '이번 한 주는 무탈하게 보냈어요' 라고 말한다면 선생님은 그렇게 받아들일 것이라는 거다. 내 손에 거짓말 탐지기를 씌워 대답을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 이상, 나는 충분히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의 순간이 그 날 진료에서였다.
사실 그 날의 상담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선생님에게 남자친구와 같이 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로 인해 시작될 대화를 어떻게 이어가야 될지도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상담을 빨리 끝내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나는 남자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대기실 밖으로 나가기 두려웠다. 그래서 평상시처럼 그동안의 기분은 어땠는지, 구토나 호흡곤란 같은 증상은 몇 번이나 발생했는지, 필요시 약은 하루에 몇 번 먹었으며 어떤 순간에 먹었는지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절주절 꺼내놓았다. 선생님은 차분히 내 말을 기록하셨다.
그리고 아마도, 상담은 그렇게 끝났다. 나는 진료실에서 나왔고, 울지 않은 말짱한 얼굴로 남자친구에게 걸어갔다. 진료비를 계산하고, 약을 처방받고, 다음 상담을 예약하고, 그 일련의 과정을 차근히 마친 나는 남자친구의 손을 잡고 병원에서 나왔다.
분명 어떤 기분이라도 들 것 같았다. 큰 퀘스트를 완료한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후련하지도, 불안하지도, 슬프지도, 힘들지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내겐 정말 아무런 기분도 들지 않았다. 이상했다. 머리가 시키는 대로 남자친구에게 '고맙다'고 말했지만, 내 마음에는 어떤 기분도 없었다. 텅 빈 것만 같았다. 하루종일 멍한 얼굴로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들어간 나는 침대에 눕고도 한참 후에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작은 속삭임을 듣고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내 모든 것을 내보여주고 말았다는, 비참함.
화나는 일이든 짜증나는 일이든 어쨌든, 이제부터는 그래, 00이는 공황이 있으니까. 약을 먹고 있으니까, 생각하며 한숨을 참고 나를 대할 남자친구와, 더 이상 평등한 관계가 깨져버린 각자의 위치같은 것.
그 사실들이 내 마음을 텅 비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