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눅눅 Mar 21. 2024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못내 나를 사랑하지는 못했다(5)

공포형-회피애착 유형의 연애 에세이

이별은 너의 손에 달려있어




죽고 싶었다. 내가 너무 초라해서, 더 이상 살아봤자 엄마와 남자친구에게 피해만 끼칠 것 같아서. 그 생각이 내 온 정신을 지배할 때마다 나는 너무나도 죽고 싶어졌다. 이 세상에서 깔끔하게 사라져버렸으면 했다. 나와 함께했던 기억마저 모조리 사라져버려서, 더 이상 엄마가 방 안에 숨죽은 채 조용히 있는 딸이 언제 죽었을까 전전긍긍해하지 않았으면 했고, 더 이상 남자친구가 불완전하고 깨진 유리처럼 도저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나같은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면 했다. 단지 그것들 때문에 나는 죽고 싶어졌다.


다만, 그저 내가 죽지 못하는 이유는 단 두 가지였다. 내가 죽으면 두 사람은 본인을 자책하며 슬퍼할 것이라는 걸 너무 잘 알아서. 엄마는 내 뒤를 따라 죽을 만큼 유약한 사람이고, 남자친구는 자신을 탓하다 못해 자신에게 벌을 주고 싶어할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그래서 나는 차마 죽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창문을 열고 창틀에 몸을 기댄 채 조금만 다리에 힘을 빼면 그대로 나는 죽을 수 있는데, 두 사람을 끔찍히도 사랑하는 나는 두 사람을 위해 죽지 않아야 했다.


매일 줄줄 우는 것은 내게 우울증이 아니었다. 내 자신이 정말 이 세상에서 없어져버리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 허무하고도 공허한 마음이 내게는 우울증이었다. 그리고 그 우울을 그나마 잠재워줄 수 있는 것이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이었다. 그 약을 끊자,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우울이 나를 덮쳐버린 것이었다.


문제는 우울뿐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우울은 약을 끊어버린 것에서 온 단편적인 증상들 중 하나뿐이었다. 가장 큰 부작용은, 정말 '이대로라면 죽을 것 같은', 말로 설명하지 못할 이상하고도 불쾌한 느낌이었다. 전신에 치닿는, 숨을 쉴 때마다 온 몸이 어지러워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해 바닥에 엎어진 채로 웅웅 울리는 머리를 땅에 댄 채 흐느끼며 울 수밖에 없는 이상한 기분이 나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오롯이 정신에서만 그치지 않는, 신체적으로 다가오는 공포에 헐떡대며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울면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나 죽을 것 같애"


헐떡거리며 울었다. 내 전화에 남자친구는 놀라 어찌할 줄 모르며, 집에 엄마가 있는지 물었다. 남자친구와 내가 통화하는 소리를 들은 엄마는 내 방에 찾아와 쓰러져있는 나를 보고 기겁했다. 그리고는 내게 다그쳐 이유를 물으며, 왜 이러고 있냐고 화를 냈고, 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남자친구는 본능적으로 내게 '정신과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전화 너머로 엄마에게 '필요시 약'을 찾아 나에게 먹여달라고 부탁했다. 엄마는 내 책상 서랍을 뒤져 필요시 약을 꺼내었고, 그 두 알을 힘겹게 삼킨 후에야 내게 평온이 찾아왔다. 거짓말처럼, 죽을 것과 같은 공포에 시달리던 나는 고작 그 자그마한 하얀색과 노란색 알약 단 두 알로 정신을 차렸다.


전화를 끊은 후 나는 엄마에게 사과했다. 걱정시켜서 미안하다고. 약을 먹었으니 나는 이제 괜찮다고. 그저 내일, 병원으로 나를 데려다주기만 해달라고. 약을 내 멋대로 끊어서 온 후유증인 것 같으니, 다시 약을 처방받아 와 먹기 시작해야 할 것 같다고.


내 말을 들은 엄마는 착잡한 표정으로 방에서 나갔다. 어느새 바닥에 누워 담요를 몸에 칭칭 두르고 있던 나는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다시 집어들어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연결음이 채 두 번도 울리지 않았는데 남자친구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내 상태가 괜찮은지 물었다.


"괜찮아, 약을 안 먹어서 그래."


내 말에 한동안 남자친구는 대답이 없었다. 화를 참는 것 같은 깊은 숨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나는 손톱을 깨물며 돌아오지 않는 남자친구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남자친구가 말을 꺼냈다.


"약을 왜 안 먹었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겐 대답할 수 있는 말이 단 하나도 없었다. 죽어도 남자친구에게는 술 때문에 약을 먹지 못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실망할 테니까. 고작 술의 유혹에 못 넘어가서 처방받아온 정신과 약을 멋대로 끊어버린 애를 그 누가 사랑할 수 있을까? 


"요새 술 먹었니?"


그리고 내 남자친구는, 내 침묵에서 답을 얻어냈다. 나는 보이지도 않는데도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뜨거워진 핸드폰을 뺨에 댄 채, 남자친구의 입에서 흘러나올 '처분'을 기다렸다.



우리 헤어지자.

나는 더 이상 너를 감당할 수가 없어.


우울증에 불안장애에 공황장애까지 있는 네가 이제는 술 마시겠다고 약까지 먹질 않는데, 불안해서 어떻게 곁에 있겠니. 네가 잘못되면 또 얼마나 죄책감이 들고, 얼마나 내가 힘들어질까. 나는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아.


미안해. 항상 곁에 있어주겠다고 했는데, 그건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너도 알지?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 내 마음도 그래.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겠다.


부디 잘 살아,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약 제대로 챙겨먹고. 술 마시지 말고. 괜히 사람 걱정시키지 말고.



머릿속에는 남자친구가 내게 말해줄 수 있는 모든 시나리오가 끝없이 줄줄 새어나왔다. 그저, 남자친구는 그 중에서 하나만 골라서 말하면 되었다. 이왕이면 내가 떠올린 것들 안에서 골라주길 바랐다. 그래야 조금은 더 감내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한참의 정적 끝에, 남자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내일 집으로 갈게. 병원 같이 가."



이전 04화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못내 나를 사랑하지는 못했다(4)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