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어슐러 K.르귄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어슐러 K.르귄
1. 유토피아와 오멜라스
영국의 작가 토마스 모어는 1515년에 『유토피아』를 출판했다. 그리스어에서 비롯된 단어 ‘유토피아’는 ‘없다’와 ‘장소’라는 의미가 결합되어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당시 16세기 영국은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거치며, 서민들의 빈곤이 극심했다. 또한 봉건사회에서 시민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에서 절대왕정을 경험했으며,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의 소용돌이가 휩쓸고 지나가던 복잡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꿨고 이상향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유토피아의 상상은 자본주의 체계에 대한 모순과 한계 극복을 바탕으로 하며, 500년이 지난 지금의 시선으로 보아도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더 나은 삶을 향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염원이 유토피아를 세웠지만, 유토피아에는 그 반대 개념인 디스토피아적인 면모를 보일 만큼 불합리하고 모순적인 체계를 지닌다. 그렇기에 유토피아는 현실의 도피처, 혹은 현실을 극복한 완전한 사회로 볼 수는 없다. 유토피아는 때로는 현실보다 디스토피아적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현실의 부정적 요소를 의도적으로 지우지 않거나 과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점들은 현실을 비판하고 대안을 질문하도록 하는 입체적인 장치가 되어준다. 현실을 우습게 비추는 거대한 우화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오멜라스’는 유토피아적인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우선 오멜라스는 평화롭고 찬란한 공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싱그러운 생명력이 느껴지는 여름 축제, 광활한 초원과 종소리에 대한 유려한 묘사는 오멜라스의 첫인상을 위한 아름다운 도입부가 되어 주었다. 오멜라스에는 ‘주식 시장이나 광고, 비밀경찰, 폭탄’이 없으며 자동차와 헬리콥터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묘사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오델라스가 현실과는 대조되는 선에 놓인 공간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현대의 문물과 과학 기술이 부재하는가에 대한 여부는 명확하지 않고, ‘심오한 과학기술’은 존재한다는 암시는 존재한다. 이러한 서술은 오멜라스가 20세기의 현실을 ‘모호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종교는 있지만 사제는 없다고 생각하자’,에서 볼 수 있듯이, 저자는 현대의 기술과 문물이 존재하지 않다고는 명시하지 않는 것처럼, 종교의 존재에 대해서도 의도적으로 모호함을 불어넣는다.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소박하고 아름다운 영혼들로 묘사된다. ‘비참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성숙하고 지적이며 열성적인 어른들‘이 모여 있으며, 그런 이들이 모여 있다는 것은 ’경이롭고 기적과 같은‘일이기도 하다. 가상의 마약 ‘드루즈’가 필요없을 정도로, 올바른 즐거움과 만족감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다. 드루즈가 주는 쾌락과 황홀함보다 오멜라스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싸움에서의 승리도, 바깥에서 얻어오는 어떤 즐거움도 아니다. ‘도처에 있는 가장 고결하고 공명정대한 영혼들과, 세상의 빛나는 여름과의 교감’은 오멜라스 사람들이 즐거움을 택하는 방법이다. 현실의 사람들보다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훨씬 더 절제력 강하고, 성숙하고 고상한 종족으로 그려진다.
2. 모순의 도시 오멜라스
오멜라스는 풍요로운 도시이고, 사람들의 의식 수준은 뛰어나다. 그러나 하나의 모순-희생양의 존재와 도덕적 선택은 이 모든 것을 비틀어 낸다. 오멜라스의 사람들이 풍요로운 도시 생활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하실에 한 아이가 갇혀 있어야 한다는 계약이 유지되어야 한다. 이는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덕적으로 여기는 공리주의의 원칙을 연상시킨다.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주의』에서 이기주의를 해소하기 위한 새로운 도덕관으로 공리주의를 제시했고, 최대의 사회적 효능을 가져오는 행복이 최고의 도덕적 가치라는 것을 핵심 명제로 제창했다. 공리주의는 가지 각색의 대상이 인간에게 주는 기쁨을 동일한 기준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전제에 입각하기 때문에, 공리주의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윤리화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밀은 전체 사회의 발전을 고려하는, 높은 차원의 어질고 너그러운 품성의 공리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 기준이 추상적이고 명확하기에,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원칙으로 우선적으로 논의된다.
오멜라스는 한 사람의 희생을 정당화한다.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오멜라스는 문제적인 도시가 되지 않는다. 지하실에 아이 한 명을 가둬두는 일로, 최대 다수의 행복을 위할 수 있다. 도시의 마법 같은 번영과 주민들의 윤택한 생활을 이르게 할 수 있다. 오멜라스에서 아이 하나가 비참해지는 것은 죄악의 행위가 아니며, 차라리 전설에 가깝다. 그것은 계약이며 신성한 약속이다. 아이를 지하실에서 내보내 도시 전체가 비참해지는 것이 바로 죄악이며 모순이다. 희생양을 향한 연민은 소모적인 감정으로 취급되고, 연민을 극복하지 못한 자들은 도시를 떠날 뿐, 지하실의 풍습을 없애기 위한 그 어떤 행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공리주의의 바깥에서, 그리고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오멜라스는 결코 인간적이지 않은 도시이다.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되어도 괜찮다는 합의와 전통은 비윤리적인 사회 이념으로 볼 수 있고, 개인들은 폭력을 정당화하고 방관했다는 비판이 이루어질 수 있다. 특히 어린아이를 인간적으로 대우하지 않았다는 점은 상당히 야만적이라는 비판을 일으킬 수 있겠다.
오멜라스 이야기는 현대의 빈익빈 부익부 문제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혀지기도 한다. 지하실 아이의 비극적인 존재는 이를 비판하기 위한 꽤 괜찮은 비유인 것 같다. ‘야윈 아이의 장딴지는 살이라고는 아예 없고, 배는 불룩 튀어나왔고’, ‘옥수수 가루와 기름 반 그릇으로 연명하고’, ‘자신의 배설물 위에 계속 앉아있는’ 아이는 오늘날 빈곤 국가의 기아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볼 수 있다. ‘아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고 ‘아이가 그곳에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빈곤 문제에 대한 책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간극을 넓혀나가는 부유한 계층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난한 국가들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어떤 문제에서 소외되어서일 수도 있지만, 부유한 국가의 무관심과 이익추구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가장 심화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진국의 농산물 보호 무역주의와 국가 간의 전쟁은 세계 식량 부족의 주원인이 되었다. 빈곤과 기아를 부추겼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유엔의 식량정상회의에는 세계 식량 배분과 생산에 주도적으로 책임져야 할 선진국 국가들이 대거 불참하기도 하며, 전 세계의 빈곤과 기아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에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현실 문제는 오멜라스의 사람들이 지하실 풍습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풍요로움만을 위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별다르지 않다. 현실에서도 부유한 국가의 풍요로움은 지하실 아이와도 같은 국가들의 비참한 처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3; 독자를 오멜라스에 가두는 서술 방식
소설은 오로지 서술자의 시선과 묘사를 통해 흘러가고 있다. 인물의 대화가 삽입되어 있지도 않고, 이름과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 등장하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소설이 단조롭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서술자가 전략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풍경을 그리는 것처럼 먼 거리를 유지하며 오멜라스를 묘사하면서도, 마치 도시 한복판에 있는 느낌이 들게끔 오멜라스를 디테일하게 그려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서술자는 독자가 서술자 자신을 모호하게 느끼게끔 유도하고 있다. ‘내가 오멜라스의 법과 규칙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어떻게 오멜라스 사람들에 관해서 여러분에게 말을 늘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여러분은 내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겠는가?’ 등에서 볼 수 있듯, 서술자는 주어가 없는 전지적 시점을 유지하다가도 ‘나’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마치 오멜라스의 사람과 대화하는 듯한 경험을 느끼게 한다. 독자는 서술자에 대한 궁금증이 풀어지기를 기대하지만, 끝까지서술자에 대한 정보는 알 수 없다. 서술자가 어딘가에 숨어 있는 듯한 이 묘한 서술 방식은 오멜라스의 의문스러움과 긴장감을 끝까지 끌고 가는 주된 동력이 되어 준다.
서술자를 열심히 따라온 독자는 그가 오멜라스의 지하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다 마치기 전까지는 이야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이야기는 독자에게 도덕적 판단을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오멜라스의 이면을 ‘알아버렸다’. 서술자는 독자에게 숨겨진 진실을 폭로했고, 질문을 던지고 있다. 독자라면 오멜라스에 남을 것인지, 혹은 떠날 것인지. 자기 안의 연민을 무시하고 유토피아를 즐길 것인지, 혹은 연민을 극복하기 위해 유토피아를 떠날 것인지. 서술자는 오멜라스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듯하면서도 자신의 판단을 감추며 결론을 내지 않는다. 오멜라스 바깥에는 어떤 곳이 있는지도 물음표로 남겨놓는다. 서술자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내면을 모두 파악하고 있을 테지만, 그들이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도 의문으로 남겨놓는다. 서술자는 이렇듯 이야기의 결론을 질문으로 모호하게 맺고 있다. 소설에서 명확한 결론은 하나이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독자가 두가지 갈래길에서 하나를 택하는 순간, 독자는 비로소 이야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단어 ‘환멸’은 ‘꿈이나 기대나 환상이 깨어짐. 또는 그때 느끼는 괴롭고도 속절없는 마음’이라는 정의를 가진다. 오멜라스에 대한 이야기와 어울리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의 복잡함이 없는 오멜라스의 여름 축제로 도피하고 싶다가도, 지하실의 딜레마가 등장하는 순간, 현실과의 기시감이 들며 환멸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여름 축제와 지하실 기아의 메타포가 강렬하게 대비된 것이 가장 환멸스러웠다. 아름다운 해안 도시에서 지하실 기아라는 소재는 예상치 못한 전개였고, 충격이었다. 현실적인 유토피아라는 오멜라스의 모순은 소설이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환멸스러운 감정과 여운을 효과적으로 자아내고 있다.
모호한 부분이 많음에도, 저자는 서술자를 통해 오멜라스의 이야기에 대한 의미를 꽤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절망을 찬양하는 행위는 기쁨을 비난하는 행위이며, 폭력을 용인하는 행위는 그 밖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행위이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무참한 학살을 통해 얻는 즐거움은 올바른 즐거움일 수 없으며, 그런 식으로 얻는 즐거움은 진정한 즐거움이 아니라 공포일 뿐이다.’ 다소 모호하게 이해되기는 하지만, 우리는 위와 같은 대목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잡아내 볼 수 있다. 지하실의 폭력이 남아있는 한 오멜라스의 모든 평화로움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지하실 희생양을 통해 유지되는 오멜라스의 풍요로움은 진정한 풍요로움이 아닌, ‘공포스러운’ 풍요로움이라는 것을. 오멜라스라는 환상에서도, 우리 현실에서도, 폭력과 희생은 그 어떤 이유로 결코 합리화될 수 없다는 것을. 오로지 고결한 영혼의 교감을 통해서만 ‘올바른’ 풍요로움으로 향할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