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딸! 너에게 쓴 편지를 모아 책을 내기로 하고, 여러 고민 끝에 정한 책 제목이 <너는 될 애>였지. 얼핏 보면 ‘너는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마.’ 정도의 뜻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야.
“너는, 될 대로 된다. 애쓰지 마라.”
잘 팔리지 않아서 이제는 절판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으나 언젠가는 희귀 아이템이 될지도 모를 책 <너는 될 애>. 청소년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 아빠의 잔소리를 집대성한, 그리하여 잔소리하고 싶은 엄마 아빠들의 억눌린 욕구를 대리 충족시켜 엄청 대박이 날 거라고 헛된 꿈을 꾸었던 책 <너는 될 애>. 아빠가 너에게 하는 유언처럼 시작했던 편지였고, 그래서 편지 모음의 제목도 너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로 정했지. 아빠가 평생 보고 듣고 읽고 배우고 생각하고 경험한 모든 것의 집합체이며 정수인 말, “될 대로 된다. 애쓰지 마라.”
먼저 ‘될 대로 된다.’에 대해.
흔히 ‘에이! 될 대로 돼라!’는 식으로 자포자기한 경우에 많이 쓰는 말이라 그 의미가 많이 오염되어 있는데, 그냥 버리기에는 워낙 좋은 뜻을 가지고 있어서 되살려 보려고 해. 될 대로 된다는 것은 ‘사필귀정’ ‘인과율’ ‘인과응보’ 등으로 설명이 가능하고, 흔히 쓰는 ‘운명’이라는 말과도 상통한다고 할 수 있어.
보통 운명을 ‘결과가 정해져 있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오해의 소지가 많으므로 여기서는 언급을 피하도록 하자. 그것보다는 ‘지금 일어난 결과를 긍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정도로 보는 게 좋아. 운명은 미래의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이라는 말이지.
중요한 것은 운명이 정해져 있느냐 아니냐, 혹은 운명이 현재의 일이냐 미래의 일이냐가 아니라 ‘운명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 있어. 현재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의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거지.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 나는 그저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할 뿐이고 결과가 어떻든 받아들이는 자세, 그 대 긍정의 태도가 바로 ‘될 대로 된다’의 뜻이야. ‘신의 뜻대로!’ 역시 같은 마음자세지.
어느 무술 고수가 제자 두 명을 가르쳤어. 가르침이 끝나고 드디어 고수는 제자들에게 하산을 허락했지. 한 명에게는 ‘너는 3번째 고수’ 다른 하나에게는 ‘ 8번째 고수’라고 알려주면서 행운을 빌었지. 그들보다 고수를 만나 싸우지만 않는다면 평생 최고의 자리를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거였으니까.
결과가 어땠을까? 3번째 고수는 산을 내려가다가 2번째 고수를 만나 죽음을 당했고, 8번째 고수는 평생 최고수의 대우를 받으며 잘 살았다고 하지.
운명이나 팔자라는 말 말고, 극히 예외적인 일이라거나 억지로 만든 이야기라는 딴지걸기 말고 어떻게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까? 진리나 법칙이라는 것이 어떤 예외도 없이 적용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고 할 때, 이 상황에서는 어떤 법칙이 작용하는 걸까?
답은 ‘알 수 없다.’는 거야. 우리는 한순간도 정해진 운명을 살지 않아. 1초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거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의 말이야.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지만 멈춰야 한다는 말은 아니야.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하고 행동을 해야 하니까.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운명이 있으나 우리는 알 수 없고, 그 운명이 우리의 실력이나 노력에 상관없는 이치로 작동되고 있다면 우리는 무엇에 의지하여 살아야 하는가? 엄청난 국가적 재난의 원흉이 무수한 욕을 먹으면서도 평생 떵떵거리며 잘 살고, 아무 잘못도 없는 갓 난 아기가 태어난 지 몇일만에 황당한 죽음을 당하고, 내가 가장 많이 듣던 노래를 부른 가수가 어이없는 의료사고로 갑자기 사망하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사건 사고가 하루에도 수없이 발생하는, 그야말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이 현실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실존철학은 ‘부조리(不條理)’라고 하고, 불교는 ‘일체고액(一切苦厄)’이라고 하여 당연시하는 이 현실... 어쩌면 기독교의 ‘원죄(原罪)’도 그런 현실을 개인화한 개념인지도 몰라.
많은 사람들이 ‘불운의 화살이 나를 비껴갈 거야.’라는 바람을 가지고 사는 것도 사실이지. 어떤 이는 예측 가능한 삶이 가능하도록 잘 구성된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어떤 이는 세상의 파고로부터 자신의 삶을 보호하려는 여러 장치들을 만들어두기도 할 거야.
“애쓰지 마라.”
애쓰지 말라는 것은 ‘이것은 이것이다.’ ‘이것이 옳다 그르다.’고 정하지 말라는 거야. 정해놓고 그 정해진 틀에 나를 맞추려는 노력, 그걸 애쓴다고 말하는 거지. ‘세상은 부조리하다.’ 거나, ‘나는 예뻐야 한다.’ ‘돈 많이 벌 거야.’ 거나, ‘나는 재미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등의 생각이 나를 구속하게 두면 안돼. 그런 생각들은 나를 지금 이 순간에서 도망가게 만들어. 있지도 않은 미래를 데려와서 현재를 속박하고, 진리가 아닌 궤변으로 지금의 순수함을 오염시키지. 애쓰지 말라는 것은 그러한 오염과 속박과 속임수로부터 벗어나 현재의 나에 충실하라는 말이야. 욕망의 굴레를 벗고 자연스러운 나의 삶을 살라는 말이야.
지금 이 순간, 현재만이 실재하고, 진실해.(사실은 그 현재라는 것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과거라는 것이 있을까? 있다는 것은 실재한다는 말인데, 있다면 가져와 봐. 실재한다면 증명할 수 있어야 해. 과거는 그저 허물 벗은 뱀의 흔적이거나 허물 벗고 변태한 매미의 시체일 뿐이야.
미래 역시 마찬가지. 우리는 있지도 않은 미래에 아등바등 매달려 살아가지. 미래를 준비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그 미래는 신기루에 불과해. 혹은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 우리는 더 이상 과거라는 껍데기나 미래라는 허깨비에 저당 잡힌 삶을 살아서는 안돼. 현재의 나에 충실해야 해. 그러다 보면 과거와 미래가 나의 현재 속에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 2014)> 기억나니? 쉽게 말하자면 그런 식인 거지.)
사랑하는 딸!
다시 한번 말할게. 될 대로 된다. 애쓰지 마라.
애쓴다는 것은 ‘이렇게 될 거야.’라는 틀을 정해 놓고 나를 채찍질하는 학대행위야. 진인사 대천명! 어떻게 될지는 그냥 ‘신의 뜻으로’ 맡겨두고, 나는 그저 현재의 나에 집중하면 돼.
될 대로 된다고 하면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아.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어. 현재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고 미래도 결정돼.(다시 한번 영화 <인터스텔라>를 떠올려 봐.)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어느 드라마의 대사가 유행한 적도 있는데, 우리의 운명도 그렇지.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아. 움직이는 거야. 지금 이 순간 여기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어 나타나.(물론, 아까 잠깐 얘기했듯이 이것-현재- 역시 실재하는 건 아니야. ‘있다’는 현상만 존재하는 거지.)
아직도 뜬 구름 잡는 말처럼 느껴진다면 이건 어때?
“그냥...”
영화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1994)>에서 주인공 톰 행크스가 국토순례 달리기를 하는 이유가 뭘까? 없어. 그냥, 그때 그 순간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달렸고, 또 멈춘 거지. 이런저런 이유는 그다음에 덧붙여지는 것뿐이고.
‘그냥’이라는 말은 ‘애쓰지 말라’는 말과 동의어이고, ‘지금 이 순간 나의 에너지에 집중한다’는 뜻이야. 이런저런 생각이나 목적이나 이유를 젖혀두고, 지금 이 순간 나의 존재에 100% 충실한다는 뜻이야. 그리고 그 결과에 승복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이야.
현실에서는 그런 시간을 목격하기 힘들지만, 스포츠나 예술작품을 보면 간혹 그런 순간이 그려지는 걸 볼 수 있어. 격투기에서 K.O가 일어나는 때를 보면 정말 아름다워. 나의 온 존재를 한껏 드러내는 그 찰나에 K.O라는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지.
갑자기 얼마 전에 본 <마리아 칼라스: 세기의 디바(Maria by Callas: In Her Own Words, 2017)>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그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칼라스가 벨리니의 오페라 <몽유병 여인(La sonnambula)>에 나오는 ‘아! 믿을 수 없어라(Ah! non creder mirarti)’를 부르는 장면이 있어. 처음 들어보는 노래이고 오래된 흑백의 화면이었는데 나는 그 아름다움에 반해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
마리아 칼라스가 최고의 가수라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지만 그 순간의 그 노래는 정말 ‘놀랍다!’는 말 밖에는 표현이 안돼. 칼라스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노래가 칼라스의 몸을 통해 저절로 흘러나온다고나 할까? 노래 후반부에 이르면 칼라스는 없어지고 노래만 남은 듯한 놀라운 경험이었어. 천의무봉(天衣無縫)! 완벽한 아름다움 그 자체! 나는 그 순간이 ‘그냥!’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예라고 생각해. 잘 부른다거나 멋지게 부르는 게 아니라 그냥 부르는 노래... ‘그냥’이란 그렇게 ‘사심이 없고 완벽하게 그 순간과 일치해 있는 나’를 뜻하는 거야.
사랑하는 딸!
아빠는 네가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걱정에 시달리지 말고, 의무에 갇혀있지 말고, 세상의 주인공으로서 위풍당당하게 살기를. 한껏 너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믿고, 결과에 언연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기를. 그리하여 너만의 아름다운 순간을 꽃피우기를. 그냥 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