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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Jun 17. 2020

딸에게 쓰는 편지 55; 앞서는 자와 뒤서는 자

    

산에 올라가서 가쁜 숨을 내쉬며 땀을 닦고 있는데, 밑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두 사람이 보여. 여자가 앞서고 뒤에 남자가 따라올라 오는데 40대 정도의 커플 같더라고. 보통 거리에서 봤으면 그런가 보다 했을 텐데, 아마 산이었기 때문에 눈에 뜨였나 봐. 등산을 하는 커플들이 많은데, 열에 아홉은 남자가 앞서고 여자가 뒤서는 모양이거든.     


남자가 앞에 가고 여자가 뒤를 따라가는 광경은 가장 클래시컬한 모습이야. 옛날 사진을 보면, 남자는 뒷짐 지고 유유자적 앞장서 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아기 업고 열심히 뒤를 따라가고 있잖아. 지금이 그런 시대는 아니지만 남자가 앞장서는 풍조는 변하지 않았다고 봐야지.

    

나는 어떤지 생각해 봤어. 엄마나 너와 다닐 때 나는 어떻게 하나... 물론 나란히 걸을 수 있으면 나란히 다니지만, 서울 길이라는 게 사람도 많고 해서 그러기 쉽지 않으니까. 일단 집을 나서서 엘리베이터 타기 전까지는 나란히 걸어. 아빠는 ‘터치’를 좋아하니까 어깨를 안고 가는 경우가 많지. 복도가 끝나고 계단이 시작되면 이제 갈림길이야. 앞설 것이냐 뒤설 것이냐?     


아빠는 대부분 엄마를 앞세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아빠는 엄마의 뒤를 따르지. 레이디 퍼스트! 신사의 에티켓일까? 그렇진 않아. 레이디 퍼스트는 보통 여자를 모시는, 심하게 말하면 택배 정신 비슷한 거잖아. 그러나 아빠가 엄마를 앞세우는 건 그런 서비스 정신은 아닌 것 같아.

    

앞장선다는 것은 주도하는 거지. 길을 선택하고 찾아가고 페이스를 조절하고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해내야 해. 아빠가 엄마를 앞세우는 것은 엄마에게 그런 일을 하라는 뜻이야. ‘나는 당신 뜻에 따를게. 당신 마음대로 해.’라는 의사표시지.     


너무 소극적 태도 아니냐고? 그렇지. 소극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선택한 거야. 아빠처럼 게으른 사람에게는 맞는 태도이기도 하고. 그러면 왜 아빠는 적극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선택했을까?     


전에 할머니 댁에서 고모하고 싸움에 대해서 얘기한 적 있지? 부부간에 싸움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 고모는 자기는 이길 자신이 있고 이기기 때문에 싸워도 된다고 했어. 그리고 아빠에게 물었지. ‘언니하고 싸우면 이기느냐?’고.     


그때 아빠는 0.1초의 틈도 없이 ‘못 이긴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정확한 답이 아니야. 남사스러워 말을 못 했지만 정답은 이거야.  

    

“나는 언니하고 싸울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왜냐? 무조건 언니의 뜻을 따를 것이기 때문에. 언니의 결정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기 때문에.”   

 

물론 엄마의 결정이 항상 옳을 수는 없지. 때론 아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어. 하지만 특별한 경우 아니면 아빠는 이의 없이 엄마의 결정을 따라.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설령 원치 않는 결과가 발생하더라도 그때 상황에 맞게 수습하면 되는 거니까.     


아빠가 말한 ‘적극적으로 선택한 소극성’의 뜻은 바로 그거야.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하라. 결과는 내가 책임지겠다.’ 그런 생각으로 엄마를 앞세우고 아빠는 뒤를 따라가는 거지.     


그러면 왜 아빠는 앞장서서 가지 못하는 걸까? 아빠가 앞서고 엄마가 뒤를 따르는 그림을 상상해 본다. 그러면 아빠는 약간 불안해. 엄마가 신경 쓰여. 잘 따라오고 있는지,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는지 자꾸 살피고 싶어. 뒤에 따라가면 항상 시야에 있으니까 그런 걱정 안 해도 되는데, 앞장서서 가면 전방보다 후방에 더 신경을 써야 해. 잘 따라올 거라고 믿지를 못하는 거지.     


어쩌면 그 이면에는 아빠의 무책임함이 있는지도 모르겠어. 아빠는 평생 주류의 삶을 거부해왔고, 질서 있게 줄 서는 삶에 익숙지 않으니까. 줄 서야 하는 상황이 되면 항상 맨 끝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이탈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으니까. 앞서는 것은 선택의 두려움과 실패의 비난을 감당할 용기가 있어야 해. 반면 뒤서는 것은 무책임에 대한 죄책감과 헌신의 자세가 필요하지.     


사랑하는 딸!

그런데 이상한 것은 너하고 다닐 때는 아빠가 꼭 앞장을 서잖아. 무슨 차이일까?     


아마 부모로서, 아직은 너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지 않나 싶어.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엄마를 앞장설 때 느껴질 법한 불안함이 너한테는 전혀 없다는 거야. 당연히 잘 따라오겠지라는 믿음이 있는 거지. 그게 부부 사이와 부모 자식 사이의 차이일까? 부부 사이는 끊임없이 연대를 확인해야 하지만, 부모 자식 사이는 그게 필요가 없는 거지. 타고난 거니까.     


그렇게 말하고 나니 뭔가 너와 나 사이에 끈끈한 연대감이 형성된 듯 좋은데? 엄마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아빠와 딸 우리 둘 사이의 연대감을 확인하고 즐기자고.

(그런데 얘기가 이상하게 마무리되는 듯? 아빠가 엄마를 믿지 못한다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기를.)

  ---딸과 분리불안이 없는 게 기분 좋은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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