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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레드미 Nov 18. 2024

쓸만한 생각

그 해 겨울 무진장 추웠지만 희망이 있었다

그 해 겨울 나는 사회로 나가는 출입증을 받지 못한 취업 준비생으로 살얼음 언 대지에서 푸른 목초지를 찾아 떠도는 유목민 같은 신세였다. 이른 봄에 면접을 보고 여름방학이 끝나자마자 회사에 취업한 친구들은 목에 사원증을 걸고 학교를 찾아와서 마지막 기말시험을 치르고 떠났다. 그들은 벌써 몇 번의 회식을 했고 잘생긴 남자 선배와 썸을 타고 있었으며, 사회 초년생의 귀여운 실수로 회사의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 있었다. 사회인이 된 친구들의 얼굴의 때깔부터 반짝반짝했다. 그런데 나는 누렇게 뜬 얼굴로 읽히지 않는 교과서 위에 엎어져 어제 설친 잠을 보충하는 취업 준비생 신세였다. 중소기업의 취업자리도 거의 끝물이었다. 이러다간 형편없이 작은 가게 수준의 소기업이나 공단의 경리로 가야 할 처지였다. 그런 곳은 최후의 수단이라도 취업하고 싶지 않았다.

겨울방학을 앞두고 있었지만 취업자리를 구걸하러 학교에 나와야 할 상황이었다. 직장도 못 구한 주제에 뜨근한 구들에 몸을 지지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여태껏 공부시켜 주신 부모님께 너무 면목이 없었다. 막바지 막장까지 몰려 작은 구인 업체의 면접이라도 보려고 학교에 왔으니 마음은 초조하고 불안했다

영하의 날씨에 1시간 30분의 교통지옥을 뚫고 교실에 앉으면 썰렁하고 음울한 분위기에 짓눌렸다. 학교는 산속에 위치하여 풍경은 근사했으나 겨울은 평지보다 훨씬 더 추웠다. 학교는 몇 명 남은 아이들을 위해 부족한 석탄을 쓸 의무가 없었다. 아침에 한 번 석탄을 받아와 난로를 피우면 오후쯤엔 열기가 사그라들었다. 난로 옆에 바짝 붙어있어도 춥게만 느껴졌다. 우리들 마음속 불안까지 더하면 잇몸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은 칠판에 자율수업이라 써넣고 조회시간을 빼곤 교실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책 없는 우리들에게 수업을 해봐야 귓등으로도 안 듣고 통제만 어려울 터였다. 우리들도 침울한 분위기로 공부는 뒷전인 상황이었다. 한 명씩 취업이 되어 떠나가면 남은 사람은 더 초라해질 것이었다.

졸업하기 전에 기필코 취업해야 하는데 면접 전에 서류 전형에서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공부 좀 하지 그랬어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뼈를 때렸다.

취업이 안된 상태로 졸업하면 대책이 없었다. 먼 친척의 친척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취업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나에겐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없었다.

팔각정  난간에 기대어  바람에 나부끼는 헐벗은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난간에 올라가 새처럼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같은 반 K가 다가와서 나에게 뭐 하냐고 물었다. 여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묻자 K가 심각한 표정으로 내 옷자락을 잡으며 여기서 떨어져 봐야 다리만 부러지고 그냥 아플 거라고 말했다. 죽지도 못하고 마냥 아프면서 병신이 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괜한 생각 말라고 충고했다. 난 별생각 없었는데 K가 얼굴까지 붉히며 화를 내서 민망했다.

교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는데 아무리 그래도 100퍼센트의 취업을 장담했으면 학교가 나서서 취업을 시켜줘야 하는 게 아니냐며 암담한 현실에 분통을 터트리고 C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을 듣자니 염치는 없지만 어떻게든 학교만이 비빌 언덕이라 비굴하게 따져서라도 취업하고 싶어졌다.

책을 읽고는 있지만 백지만 훑을 뿐 글자는 눈에 씌운 망사 거름망으로 걸러지는 느낌이었다. 뇌는 세찬 바람 앞에 문풍지처럼 불안하고 초조하게 떨고 있었다.

P가 책 한 권을 읽어보라고 건넸다. 장석주 시인이었다. 교과서에서 본 적이 없는 시인이었다. "희망이 모든 가난한 사람의 빵이 아니듯 나의 시는 나의 칼이 아니다." 갑자기 눈이 번쩍 떠졌다. 어떻게 이런 시를 쓸 수 있을까? 모든 시어 위로 감탄사를 추임새로 넣으며 홀린 듯 읽고 있었다.

시를 쓰고 싶던 간절함이 잘난 시로 인하여 주눅이 들고 말았다. 나의 무능력이 뼛속까지 파고들어 만만하게 펜을 들던 나를 처참하게 무너뜨렸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괜히 시를 쓰겠다고 설쳤다는 자괴감과 좌절, 후회가 몰려왔다

누군가 밖에 눈이 온다고 소리쳤다. 교실 창밖으로 인왕산 처연히 누운 처녀 등선 위로 하얀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흰 눈이 쌓여 살얼음이 되고 빙판이 될 지금의 내 심정은 내가 그동안 뭐 하고 살았나에 대한 자책이었다.

수업 시간에 아프다고 양호실에서 땡땡이친 일, 방과 후 금린 같은 벚꽃 아래에서 마냥 서있던 일, 멀미가 심하다고 하교 후 책가방을 던지고 놀기만 한 일. 내내 여름일 것 같아 베짱이처럼 노래만 부르며 유유자적 게으르게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다 보니 열심히 일한 개미의 계절에 이런 폭풍 질책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열심히 산 개미가 부유하고 따뜻한 집에서 행복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부진한 성적의 취업 준비생으로 추운 거리를 떠도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원망이 생기는 건 왜일까? 게으름이 내 발목을 잡자 나는 애초에 나를 베짱이로 만든 신에게 책임을 돌리고 내 탓을 회피하고자 했다.

시와 소설로 밥벌이를 할 생각은 없었다. 재능이 없다는 걸 증명하는 수많은 신호를 눈치챘지만 애써 외면했다. 끝맺지 못한 수많은 파지는 내 마음이었다. 아무리 사랑해도 곁을 주지 않는 짝사랑인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성적이 바닥을 기었지만 교과서를 베고 자면 머릿속에 글자들이 아로새겨져 척척 해답을 내놓는 발명품이 나오기만을 바랐다.

노력도 없이 좋은 결과만 원했으니 당해도 싸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당연한 자연의 섭리가 무자비하게 느껴지는 건 무능력의 고통이 나를 신뢰한 사람들을 배신하고 빌붙는 가난한 삶을 강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막노동을 해서라도 꿈을 이루겠다는 신념은 생기지 않았다. 나 자신이 한심했다. 도대체 어찌해야 할까, 나는?

학교에서 죽친다고 취업자리가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떡볶이나 먹으러 가자는 B의 말에 솔깃해졌다. 미래를 걱정하고 고민하느라 입맛이 없어야 할 순간인데도 허기가 돌았다. 12시가 되지도 않았는데 점심 먹으러 갔다가 뭔 일이 생길까 봐 망설여졌다. 그럼 넌 안 갈 거지라며 매몰차게 돌아서는 B의 소매 부리를 낚아챘다. 아니, 나도 같이 갈래 몸이 저절로 B를 따라나서고 있었다.

흰 눈이 온 교정은 순결한 백지 같았다. 교문을 나서며 돌아보니 B와 나의 발자국이 서정시처럼 쓰여 있었다. 떡볶이집에서 잘생긴 디제이에게 음악을 신청하였다. 현실도피처로 시집가는 건 어떨까? 누구라도 날 신부로 맞아준다면 솥뚜껑 운전수로 취업하고 싶었다

맵고 뜨끈한 떡볶이를 먹으며 몸의 냉기를 걷어냈다. B와 이런저런 현실의 무거운 고민과 갈등을 이야기했다. B는 형편이 어려워 실업계를 지원했지만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하고 있었다. 나한테 불평만 하지 말고 노력하라고 충고했다. 말이야 쉽지 너는 내 입장이 아니니까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야 하는 반발심이 일었다. 하지만 B의 말이 가장 정답에 가까운 적절한 해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내 처지는 취업도 못하는 무능력자의 암흑 속이었다. 그런데 헛헛한 배를 채우니 귀에 익은 유행가가 들리고 생기 넘치는 주변이 보였다. 불행만을 바라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걱정이 옅어졌다. 과거의 과오는 열심히 사는 것으로 책임을 다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망에 매몰될 필요는 없었다.

뜬금없이 나중에 이 상황을 글로 쓰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서 당하는 나에게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이 지질함이 희극일 테니... 낙관이 곁을 내주자 나는 무엇이든 글의 소재가 될 거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잘 쓴 글이어서 쓰는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 글을 쓰는 행위는 좋은 방향에 서려는 의지를 다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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