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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씨 운명을 서러워하네

by 레알레드미

나는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가 아니라

지혜의 물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니라

서류의 숲에서 길을 잃은 평범한 사무원이라네

오늘도 나는 정형화된 건조한 문체로 보고서를 만들지

책임 회피용 보고서는 본능을 거세당한 사냥개 같아

사냥감을 물고 있지만 명령을 기다리며 복지부동하네

이러한 보고서는 내용에 따라 몇 개의 단어를 바꿀 뿐

마치 쇼윈도에서 철 따라 옷을 갈아입는 마네킹처럼

확고한 틀에 일정한 규칙을 준수하며 일목요연하게 작성되지

파티에 초대되어 형식적인 인사말을 남발하는

내실이 없는 화려한 미사여구의 답답한 보고서들

전혀 새로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무사태평의 답습과

견고하고 반듯한 틀에 스스로를 재단하는 기계적인 문체

나는 매일 문서를 만들고 조직의 근무시간을 준수하네

기계의 부품처럼 제 살을 깎아 나사를 조이며

그 품삯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평온한 일상을 누리네

하지만 서류에 기재된 형식적 내용과 개성 없는 필체는

언젠가 폐기될 나를 확인하는 서글픈 서명이 될 거야

하루의 노고를 증명하는 마침표조차 흐려지면

보존가치가 없어진 나는 서류와 함께 사라지겠지

오랫동안 하얀 문서에 제시간에 묶어 놓고도

한 번도 반짝이지 못했던 무명의 필체여, 안녕!

내 지상의 이름은 그 누구도 기억 못 할 무명씨

나는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가 아니라

나는 지혜의 물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니라

폐기된 서류의 숲에서 길을 잃은 가련한 사무원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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