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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Dec 22. 2020

김부장 머릿속의 지우개

손예진 말고 김부장.


  늦은 밤 TV 채널에서 영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를 방영하기 리모컨을 고정시켰다. 사랑하는 연인이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슬픈 소재의 영화데, 나는 문득 그 대목에서 왜 김부장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어처구니없던 발상은 다음 날 아침 김부장을 보고도 여전히 떠올랐다. 지우개는 손예진 머릿속이 아니라 김부장 머릿속에 있지 않을까?


  물론 내가 그런 사고를 하기까지에는 일련의 과정이 있었다. 단편적으로 부장은 항상 비슷한 결의 말들을 입에 달고 다녔다.



 내가 언제?(불과 어제요.)
 내가 그렇게 시켰다고?(네. 맞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진행한 거야?
(부장님 마음이요.)



  김부장과 일을 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반에는, 내가 잘못 듣고 잘못 이해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계속될수록 김부장을 향한 나의 의심은 무럭무럭 피어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나의 기억이 잘못되지 않은 일들이 더럿 있었기 때문이다. 흑백 논리는 펼치고 싶지 않지만 둘 중 하나는 참이었다. 김부장의 머릿속에 정말 지우개가 있거나, 그가 모르는 척 끝내주는 연기를 하고 있거나.

 

  이따금 억울한 직원들은 김부장에게 직언을 날리기도 했는데, 김부장은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올 때마다 역으로 반문하곤 했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는지? 내가 그런 말을 한 증거가 있는지? 아무쪼록 확신에 찬 김부장의 연설을 듣고 있노라면 대부분은 늘 한 발 물러섰으나 단 한 명은 제외였다. 통 튀는 성격이던 박사원은 증거를 남기기 위해, 김부장과 통화를 하기 전 항상 녹음을 해야겠다며 이를 갈곤 했다.


  보통날처럼 그 날 역시 김부장과 박사원 사이에 오고 가는 실랑이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김부장은 박사원에게 으름장을 놓았고 결국 박사원은 참다 참다 비장의 카드를 들이밀었다. 박사원은 김부장과의 녹음된 통화내용을 사방에 공표했다. 녹음본에  담긴 김부장의 지시는 박사원이 주장한 바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사원이 김부장을 한방 먹인 셈이었는데, 김부장은 껄껄 웃기 시작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


  다른 사람의 실수는 요목조목 따져가며 책임을 묻던 그가 자신의 실수는 그저 실수라 치부한 채 일을 무마시켰다. 




  이래저래 김부장에게 얼굴을 붉히던 이들이 계속 늘어가던 나날 김부장의 코를 꺾을 자가 등장했다. 업무 로테이션이 되면서 김부장의 위로 부임된 상무가 그 히어로였다. 김부장은 보는 사람마다 한참을 붙잡고 자신의 불만을 토로했다.


 "새로 온 상무 말이야. 본인이 그렇게 시켜놓고 모르쇠 하는 거 있지?"


 "책상 밑에 녹음기라도 설치해 버릴까. 분하네."


  김부장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하면 불륜'의 표본이었으니, 그러려니 했다. 실질적인 문제는 아래 실무진급 사이에서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상하 프로세스 구조로 업무를 하니 가끔 잘못된 결과에서는 책임의 주체가 사라지곤 했다. 윗선에서는 모두들 본인이 지시한 방향이 아니라고 하니 그 대가는 고스란히 실무진에게 전가되기 일수였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듯 김부장은 상무에게 당하는 일이 많아지, 스스로 조심하려는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업무 지시 끝에 본인이 말실수한 것은 없는지 재차 확인하거나, 다시 한번 리마인드 시켜주는 등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던가. 역지사지(易地思之)큼 좋은 결정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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