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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Mar 22. 2021

가정의 달에 회식 잡는 상사

집에 그만 들어가 보셔야지요.


  정과장은 여자 직원들 사이에서 가정적인 남편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왜 그런 소문이 돌았냐면 정과장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 때문이었다.


  나는 명절에 내가 음식 다 해. 와이프는 아무것도 안 시켜. 막말로 본인 조상한테 올릴 음식도 아니잖아.


  우리 와이프도 그 집 디저트 좋아하더라. 말 나온 김에 퇴근할 때 사서 가야겠다.


  애들 때문에 와이프가 힘들어해서 종일 일에 집중이 안 되네. 육아휴직이라도 써야 할까 봐.


  대체로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온 8090세대들은 정과장을 좋은 남편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대화를 할 때면 그에게 묻어나는 가족을 향한 애정이 느껴졌었다. 누구라도 그가 꽤 다정한 남편이며, 헌신적인 가장이라는 것을  수 있다.      




  단 그가 조금 역설적이라고 느껴졌던 것은 그가 회식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워낙 사람들을 좋아하고 정이 많은 사람인지라,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했지만 의아한 구석이 꽤 많았다. 때는 5월 가정의 달, 어린이 날을 바로 코 앞에 둔 날이었다. 미혼자들은 오랜만의 휴일에 칼퇴를 외치며 업무에 박차를 가했고, 기혼자들은 내일 아이를 데리고 어디에 가야 할지 서로 공유하며 벌써부터 피곤한 기색을 비췄다. 어느 쪽이든 오늘은 집으로 바로 들어가야 할 일정이었다. 퇴근을 몇 분 앞둔 어수선한 분위기 속 정과장이 해맑게 등장했다.


  “내일 쉬는 날인데, 밥이나 먹고 들어가죠.”


  대부분의 기혼자들은 집에 일찍 들어가 봐야 한다며 제안을 거절했고, 몇몇 기혼자들과 별다른 일정이 없던 미혼자들이 자리에 동참했다. 간단하게 1차로 밥만 먹고 헤어질 생각이었지만, 다들 1차를 마치고 갈 채비를 하니, 정과장은 아쉬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이왕 늦은 것, 2차로 술이나 한 잔 할까요?”

  “과장님. 형수님께서 뭐라 안 하세요?”

  “나야 뭐, 평소에 워낙 잘하니까. 와이프가 실컷 놀고 들어오래.”

  “저는 내일이라도 잘해야 해서 이만 들어가 볼게요.”


  결국 몇 없던 기혼자들마저 몽땅 1차에서 빠지고, 정과장과 미혼자들만 2차로 향했다.  정과장은 술자리에서 이래서 평소에 잘해야 된다며, 특별한 날만 잘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등 혀를 찼다. 그 말에 다들 호응을 하며 추임새를 넣었다. 조금 낯 부끄러운 장면이었다. 정과장은 기분이 좋은 지 벌게진 얼굴로 술잔을 들었다. 허리띠 밖으로 흘러내린 와이셔츠가 맥주잔에 담겨 젖어 들어갔다.     


  4차까지 이어진 술자리에 이미 막차는 끊겼고 택시는 야간 할증이 붙은 지 오래였다. 정과장은 같은 방향이니 가는 길에 내려주겠다며 뒷자리에 우리를 태웠다. 얼마 가지 않아 킥보드를 타고 나타난 대리기사가 빠르게 운전좌석에 탑승했다. 대충 종착지를 알려 준 정과장은 빠르게 잠에 들었다. 코까지 골며 몸을 늘어뜨린 것을 보아하니 만취상태가 틀림없었다. 바람소리와 도로를 쌩쌩 달리는 자동차 소리만 들리다가 정적이 깨진 건 정과장의 휴대폰 벨소리로부터였다.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난 정과장이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그 순간 건너편 상대의 음성이 차량 스피커로 울려 퍼졌다. 핸드폰 블루투스가 갑작스레 연결되어 버린 것이다.


  “지금이 몇 신데 안 들어와?”

  “아. 여보 그게 아니라.”

  “제정신이야? 내일 어린이 날인지 알고는 있어? 당신 애아빠 맞아?”

  “지금 가고 있어. 그리고 잠깐 좀 조용히 해봐.”


  정과장은 허겁지겁 휴대폰을 만지면서 블루투스 기능을 찾는 듯했다. 당혹스러워하는 마음이 뒷자리까지 느껴졌다. 민망하기도 했지만 정과장이 조금이라도 난처해하지 않았으면 싶어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뭐? 허구한 날 술이나 먹고 다니고. 이럴 거면 결혼은 왜 했는데?”

  “아 쫌!!”


  정과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고 전화는 끊겼다. 감은 두 눈에 경련이 일었다. 가정적인 줄로만 알았던 정과장의 실상은 전혀 딴판이었다.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털어내는 소리와 함께 글러브박스를 발로 차는 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다. 차라리 택시를 타고 들어갈 걸 깊게 후회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고 나서 차 안에 있던 당사자들은 이 일에 대해서 함묵하기로 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이전과 똑같이 정과장을 대했다. 며칠이 지나도 별 이야기가 나오지 않자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과장은 그 일 이후로 당시 차 안에 있던 이들에게는 더 이상 저의 가족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차라리 그 편이 우리도 거북하지 않아 좋았다.     


  몇 달 후 신입사원이 들어오고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정과장 자리에서 들려오는 화기애애한 음성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결혼은 가정적인 사람이랑 해야 해. 너희들 남자 얼굴 보지 말고! 나중에 되면 다 필요 없다.”


  정과장의 말을 끝으로 과장님 아내 분은 좋으시겠다는 둥, 그런 남자 찾기 힘들다는 둥 얼굴이 화끈거리는 얘기를 하는 신입사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흘러나오는 바람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 또 시작이구나.’     



  조직에는 사회가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점들로 자신을 꾸며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포장된 이미지로 주위 사람에게 환심을 산다. 그리고 보다 수월하게 타인에게 접근한다. 바깥에서 볼 때에는 너무 완벽한 사람이지만, 그가 당신에게 아무 이유 없이 접근한다면 다소 경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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