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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고래 Oct 08. 2021

너무도 반가웠지만 너무나 무서웠다.

엄마도 처음인데 세 쌍둥이라니!!

 이 글은 육아일기는 아니다. 내 아이들과 함께한 10년 동안 힘들고 아프기도 했지만 얼마나 사랑하고 행복했는지 잊지 않기 위해 쓰는 것이다. 따뜻하지만 다정하진 못한 엄마이기에 글로라도 표현하고 싶어 세 쌍둥이에게 주고 싶은 편지 같은 글이다. 세 쌍둥이가 오기 전부터 얼마나 기다리고 사랑했는지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다. 10년의 기록을 시작해본다.


 2010년 28살.. 참 예쁜 나이에 동갑내기 짝꿍이랑 결혼을 했다. 짝꿍이랑 나의 가족계획이 어마 무시했기에 (나는 3명, 짝궁이는 5명...??) 우린 빨리 아이를 낳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셋을 낳고 키우려면 적어도 5-6년은 일을 못할 테니 하고재비에 성격도 급한 나에겐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서 빨리 끝내고 싶었다. 무슨 게임에서 퀘스트 깨기 미션을 받은 것처럼, 타임어택을 하는 기분이었다. 육아가 뭐 생각하고 계획하면 뚝딱! 되는 줄 알았던 시절이라 지금 생각하니 그저 웃음만 난다.


 그렇게 무지막지한 자녀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는데 바로 아기가 찾아왔다! 평소 신체 변화에 예민해서 초음파에 보이기도 전에 알아버렸는데, 기쁨도 잠시 차를 타고 가다 끼어드는 옆 차에 너무 놀라 유산이 되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 아기가 있었는데 없다니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아기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정말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본 것 같다. 맘스** 카페에서 살다시피 하며 정보를 공유하고 실천했다. 배란테스트기를 기본이고, 나팔관 조영술 등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그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그 친구... 손꼽아 기다리던 아기는 안 오고 그 친구가 오면 절망스러운 기분으로 너무나 우울했다. 그렇게 1년쯤 지났을까... 알고 보니 우리 부부는 불임에 가까운 난임이었고 시험관 시술 밖에는 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분명 자연임신을 했는데 불임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시험관을 해보자는 것도 자연임신 경험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했다. 재고 따지고 할 것 없이 덤벼들었다. 


 당장 시작해도 언제 될지 모르는 것이 시험관 시술이라는데... 수정란 이식까진 사람의 영역이지만 착상은 신의 영역이라는데 나에게 정말 아기 천사가 올까, 오기는 오는 걸까, 소중히 찾아온 천사도 못 지켜 줬는데 또 온다고 내가 잘 지켜줄 수 있을까? 이런저런 걱정이 잠시 들었지만 그래도 현실은 냉정하니 당장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시험관 시술은 정말 여자한테 지옥 같은 일이다. 매일 호르몬 주사를 맞아야 하고, 병원에 때맞춰 갈 수 없으니 스스로 배에 주사를 놔야 했다. 처음엔 괜찮았지만 2주쯤 지나니 난소 부근 주사 놓는 자리는 멍이 들고 부어서 바늘도 잘 안 들어갔다.  순간순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과 너무 서글퍼서 자괴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아기를 너무도 원했고 간절했기에, 나보다 더 힘들어하는 짝꿍이가 불쌍해서 나는 더 용기를 냈다.

지긋지긋한 자가주사


 첫 시술은 실패였다.

난자도 너무 작게 나왔고 수정란도 상태가 안 좋았다고 하였다. 역시 나한테는 한 번에 무엇을 주시는 일이 없구나 싶었다. 살면서 깨달은 점이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언제나 느리게 온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기대했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했기에 2차 시도를 시작했다.


 호르몬 주사는 몸에 무리를 많이 주기 때문에 연속으로 하기가 힘들어 2달은 쉬고 해야 한다고 했다. 쉬는 동안 사실 고민을 많이 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가, 아직 우리 어린데 다시 자연임신 기다려볼까, 아기 없이 살아도 안되나?... 등등의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혼할 때 짝꿍이가 대학 졸업 전이라 취업 준비 중이었는데 당시 조선소 경기가 호황이라 대우조선에 취업하기 위해 창원에서 거제도로 이사를 갈 수밖에 없었다. 거제도는 난임 전문병원이 없었고 시험관 시술을 위해서 창원에 있는 병원까지 다니기도 힘들어 이사 가기 전, 시술 한 번 더 시도하고 가자고 결정한 것이다.


 두 번째 시술은 더 힘들었다. 체력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심리적으로 너무 많이 고통스러웠다. 매일 밤 호수 산책로를 걸으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 등등 어디라도 신이 계시다면 나의 기도를 듣고 아기천사 좀 보내주시라고, 제발 하나만이라도 허락해 주시라고 기도했다. 용지 호수에 뜬 달을 보며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두 번째 시술을 했고 왠지 처음 하고 다른 느낌이 들었다. 수정란 이식을 하고 나오는데 배가 미친 듯이 고팠다. 태풍이 오던 날이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든든히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샤부샤부를 야무지게 먹고 푹 잤다. 맘 편한 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했던가? 첫 시술에는 너무 불안해서 잠도 잘 못 잤는데 애니#한다고 정신이 빠져 불안한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드디어 호르몬 주사 때문에 이식 후 일주일부터 임신테스트기가 가능하다 했지만 3일이 지나서부터 해보기 시작했다. 정말 진한 두 줄에 눈물이 났다. 아직은 안심할 수 없으니 매일 해봤던 것 같다. 수정란 이식 후 첫 피검사에서 임신 호르몬 수치가 100-200이면 안정적으로 착상된 것인데 나는 1600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나왔다. 전화해준 직원분께 얼마나 감사하다고 했는지 횟수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말했던 거 같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단태아가 아님을 알 수 있었고 쌍둥이기를 바랐다. 

기적의 임신테스트기

 궁금한 마음에 못 참고 시술을 한 병원 말고 평소에 다니던 산부인과에서 초음파 검사를 하는데 정말 아기집이 2개였다. 의사 선생님도 축하한다며 아들, 딸 하나씩 이면 좋겠다고 해주셨다. 그렇게 쌍둥이라 생각하고 지내던 어느 날 6주 차가 되어 검사를 받던 중 의사 선생님이 몹시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시며 아기집이 하나 더 있는 거 같다고 하셨다. 순간, 진료실 안은 정적으로 가득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축하만 하기엔 세 쌍둥이는 좀 충격적이지 않은가?

세 쌍둥이 첫 초음파 사진

  의사 선생님 말씀이 나는 키도 보통이고 허리가 짧고 몸이 크지 않은 편이라 세 아기를 품기엔 공간이 부족하다고 했다. 나도 아이들도 위험할 것이라고 했다. 셋 중 하나를 포기하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도 짝꿍도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아기를 내가 위험해진다고 선택 유산을 할 수는 없었다. 우리 둘은 짠 듯이 무조건 낳을 거라고 선택 유산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고 병원을 나왔다.


선택 유산은 바늘로 아기의 심장을 찔러 멈추게 하는 거라는데 엄마가 어떻게 아기를 사지로 몰아넣을 수는 없는 것이다. 심지어 잘못하면 셋 다 잘못되는 경우도 있다는데 더더욱 할 수가 없었다. 태어날 아기들이면 건강하게 태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엄마가 지켜줄게 아가들!! 우리 꼭 건강하게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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