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양양의 바다와 트럼펫

Day2 ; 양양

by 현정

심한 배탈이 났다. 여행 첫날밤에 배탈이라니. 여행을 떠나온 지 다섯 시간 만에 내가 배낭여행과 맞지 않다는 걸 깨달아서였을까. 유난히 집이 그리운 밤이었다. 그리움 때문이었는지 억지로 욱여넣었던 닭강정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위장의 심술로 괴로운 밤을 보냈다.


지금 묵고 있는 숙소를 예약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이 방, 이 침대에 누워 일출을 보기 위해서. 잠들기 전 일출 시간에 맞춰 알람까지 맞춰놓고 잠에 들었는데, 토사곽란의 밤을 보내고 나니 일출이고 뭐고 그냥 푹 자고 싶은 마음이었다. 맞춰두었던 알람을 전부 해제하고 마침내 진짜 잠에 빠져들었고, 눈을 뜨니 10시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배도 괜찮아진 것 같고 한 번 나가볼까 싶어서 씻고 길을 나섰다. 해파랑길 44코스, 양양의 해변가를 따라 만들어진 걷기 여행 코스다. 오늘은 무작정 이 길을 따라 걸어볼 생각이었다. 걷다가 지치면 근처에 보이는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완벽한 카페를 마주했다. 그 카페에 끌렸던 것은 계단에서부터 흘러나오던 폴킴의 노래 때문이었다. 홀린 듯이 카페로 걸어 올라갔고 커다란 카페에는 직원 한 명뿐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가서 앉았다. 양양 하늘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던 먹구름이 사라지고 없었다.


반쯤 읽다 만 글배우 작가의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테라스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많이 울었다.


“아버지는 운동선수셨는데 내가 병을 앓고 있는 걸 아시고

평생 해 온 운동을 그만두셨다고 한다.

왜냐면 당시에 운동을 해서는 돈을 많이 못 벌었기 때문이다.

원래 그만두려 했다고 하시지만

병원비를 마련했어야 했기 때문인 걸 안다.

나도 꿈이 있어봐서 안다.

누군가를 위해 꿈을 포기할 수는 있지만

그건 결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아니라는 걸

어쩌면 평생에 남을 만큼 속상한 일이라는 걸

아버지는 아마 티 내지 않고 그 눈물을

혼자 흘리셨을지 모른다.”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중에서


내가 그토록 미워하고 원망했던 엄마도 나를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했겠지. 엄마란 그런 거니까. 그런데 나는 그까짓 술 하나 포기하지 못한다고 엄마를 죽도록 증오했던 거구나. 그랬던 거구나. 한참을 울고 다 녹아버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셨다.




카페에서 나와 걸어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갔다. 아까와 같은 길을 반대로 걸어갈 뿐이었는데 어쩐지 기분이 달랐다. 트럼펫 소리가 들렸다. 내가 걷고 있던 해변가 위쪽 정자에서 누군가가 바다를 향해 트럼펫을 불고 있었다. 그 정자 아래 나무 그늘에 숨어 한참이나 연주를 들었다. 몇 곡의 노래를 들었는지 모르겠다. 왠지 그 트럼펫 소리가 너무 슬퍼서, 그냥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 가만히 다음 노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더 이상 트럼펫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정자를 바라보니 정자는 텅 비어있었다. 내가 트럼펫 소리의 곁에 머물러준 것이 아니라, 양양의 바다와 트럼펫이 나를 위로해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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