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핑크뮬리 보니까 생각이 나서요
Day8 ; 안동
너무 빨리 철든 첫째였다. 술 취한 엄마와 어린 동생이 있기에 한 순간도 방심하며 살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어린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철든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꼭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시리다. 아이답게 크지 못한 아이들은 커서 분명 병이 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일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으로 살아왔다. 늘 평정심을 유지하자고, 아무리 놀라고 무섭고 두려워도 겉으로 티 내지는 말자고, 그렇게 모든 감정을 속으로 삭이며 자라왔다. 좋은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기쁨, 고마움, 행복, 사랑, 뭐 하나도 마음껏 표현하질 못했다. 우와, 짱이다, 고마워, 좋아, 나도 사랑하지. 이게 다였다.
이렇게 자란 내가 둘째가 됐다. 나와 성별은 같지만 성이 다른 언니와 성은 같지만 성별이 다른 남동생 사이에서 그간 쌓아왔던 내 정체성은 흔들리고 말았다. 이모들은 내게, 언니는 혼자고 동생은 남자니까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잘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다리 역할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연애는 셀프”를 외치며 그 흔한 친구들 소개팅 주선도 한 번 안 해봤던 사람이다. 그런 내가 둘째라니, 첫째와 셋째의 연결고리라니. 눈앞이 캄캄했다.
언니한테 자주 연락하며 지내라는데 나는 친구들에게도 연락을 잘 안 하는 사람이었다. 나눈 대화의 양이 많지도 않아서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 지도 잘 모르겠었다. 그렇다고 엄마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그토록 미워하며 지낸 엄마가 언니에게는 그리움의 대상일 수도 있을 테니까.
한 번은 친구에게 이런 답답함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나도 언니와 잘 지내고 싶은데 누군가에게 살갑게 대해본 적이 없었던 지라 너무 어렵다고. 친구는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말했다.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언니에게 연락하지 않은 상태로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내가 왕따 주동자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생과 언니 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는 장벽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엄마의 장례식 이후 친해질 시간이 필요한 우리는 막내 이모의 주도 하에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첫 번째 모임 때, 언니는 다음 날 형부와 조카들을 데리고 핑크뮬리를 보러 간다고 했었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을 텐데 제대로 구경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리고 나는 오늘 안동에 왔다. 안동역 뒤로 낙동강을 따라 조성되어있는 강변 공원에는 그라스원이라는 핑크뮬리 공원이 있다. 다들 핑크뮬리, 핑크뮬리 노래를 부르길래 나도 한 번 구경 가볼까 싶어서 한참을 걸어간 그 공원은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핑크뮬리 노래를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핑크색 물결에 한참이나 취해서 연신 셔터를 눌러대고는 공원을 빠져나왔다. “나도 봤다. 핑크뮬리!”하며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고 나니 문득 언니가 생각났다. 핑크뮬리라는 대화의 물꼬도 생긴 김에 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언니, 잘 지내시죠? 여행하다가 핑크뮬리를 보니까 언니 생각이 나서요. 형부한테 받은 용돈 아주 잘 쓰고 있다고 전해주세요. 여행 마치고 서울 가면 또 봐요.”
그 뒤로 짧은 메시지가 몇 차례 왔다 갔다 했다.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처럼 휴대폰을 붙들고 내내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어쩐지 안동에서의 핑크뮬리가 더 아름답게 기억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