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나는 겨울나무가 되었다

Day9 ; 순천

by 현정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경상도에서 내 배낭여행 끝나겠어’


여행을 시작한 지 8일째 되는 밤이었다. 처음 집을 떠날 때 계획해둔 여행 일정은 딱 3주였다. 그중 절반 가까이가 지났는데 아직도 경상도라니, 그것도 경상북도! 경상도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통영 근처에는 발도 못 붙인 상태였다. 어떻게든 통영에 가보겠다고 이리저리 경로를 짜 봤는데 경상도 내에서도 통영은 너무나 먼 도시였다. 차라리 서울에서 가는 게 더 빠르겠다고 느껴질 만큼. 결국 통영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통영과 인연이 없나 보다 생각하면서.


남해안을 따라 있는 도시들 중에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았다. 통영과 거제를 포함해서 고성, 남해, 광양, 여수, 순천, 강진, 해남까지. 이곳을 다 둘러보다가는 정말 여행이 끝나는 날 KTX를 타고 서울에 올라가게 될 것만 같았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안동, 여기서 가장 쉽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곳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다음 여행지는 순천으로 결정되었다.




한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또, 나는 주말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게다가 여행지는 순천. KTX가 통과하는, 전라도에서는 꽤나 큰 도시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좁은 땅덩이를 이리저리 잘 활용한다는 사실을 이번에 또 한 번 깨달았다. 힘들게 힘들게 숙소를 잡았다.


안동에서 순천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우선 안동터미널에서 동대구역복합환승센터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이동한 뒤, 그곳에서 순천 가는 고속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무방비하게 움직이는 게 이번 여행의 콘셉트이긴 했지만 동대구에서 순천 가는 고속버스가 그렇게 많지 않았기에 열심히 시간을 계산하고 계획한 대로 움직였다.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순천 숙소에 도착하니 오후 4시였다. 열심히 길을 찾느라 방전되어버린 휴대전화를 충전기에 꽂아두고 시집을 꺼내 들었다. 안동의 북스테이에서 구입해온 시집이었다. 오후 4시에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시집을 읽는 것은 행복이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는 여행, 주말이지만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여행, 온전히 나만을 위한 여행. 괜히 웃음이 났다.


시집 한 권을 그 자리에서 모두 읽었다.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시가 왠지 마음에 와 닿았다.


<겨울나무> - 류근

다시 이 삶은 혼자 서 있는 시간으로 충만할 것이다

아주 튼튼하게 혼자여서

비로소 이 세상에 혼자인 것들과

혼자가 아닌 것들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잘 지나간 것들은 거듭 잘 지나가라

나는 이제 헛된 발자국 같은 것과 동행하지 않는다

혼자가 아닌 것은

더 이상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이승이 아니니


류근 시인의 시들로 묶여있는 이 시집의 제목은 《어떻게든 이별》이었다.

시집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순간, 내 이별은 완성되었고 나는 순천의 겨울나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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