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코인 세탁기의 표준과 강력 사이
Day11 ; 여수
순천만국가정원에서부터 순천만습지까지, 인대가 늘어진 발목을 부여잡고 너무 오래 걸어서였을까. 여행 10일 차의 밤, 순천 숙소로 돌아온 내 왼쪽 발목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혹시 몰라서 챙겨 왔던 발목 보호대를 급하게 착용하고 부기가 가라앉길 기다려봤으나 소용없었다. ‘흥, 이제 와서 왜 챙겨주는 척이야?’ 늘어난 인대 주변으로 파랗게 올라오기 시작한 멍이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하루의 휴식을 갖기로 했다. 휴식에 필요한 것은 바다 그리고 좋은 호텔. 망설임 없이 다음 여행지는 여수로 정했다. 여수 엑스포역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위치한 4성급 호텔로 숙소를 잡았다. 일요일 1박이어서였는지 특가로 패밀리 트윈 객실을 잡을 수 있었다. 더블 침대는 내가 쓰고, 싱글 침대는 배낭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여행을 시작하고 처음 타는 기차였다. 무궁화호, 티켓값 2,600원, 소요시간 약 25분. 짧은 기차여행이었지만 무궁화호 특유의 냄새 때문이었는지 진짜 여행을 떠나왔구나 싶었다.
여수엑스포역은 기대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서울역까지는 아니어도 용산역 정도의 규모는 되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 안에는 그 흔한 패스트푸드점도 하나 없었다. 체크인까지는 남은 시간 동안 역 안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이나 카페에서 뭐 좀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야겠다 했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가까운 카페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다들 차를 가지고 여행을 하는지 걸어 다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와는 비교되게 텅텅 비어버린 인도를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만이 함께 채워주고 있었다. 괜히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며 걸었다. 나 여기 있다고 알려주듯이.
10kg에 가까운 배낭, 무릎 나온 트레이닝복 바지, 한껏 더러워진 흰 운동화로 무장한 배낭여행자가 4성급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나부터도 왠지 모를 이질감에 휩싸였다. 체크인을 마치고 포근한 싱글 침대에 배낭을 풀었다. 따로 챙겨 온 에코백에 옷을 옮겨 담았다. 호텔 2층에 있는 코인세탁실에 갈 계획이었다.
코인세탁실은 텅 비어있었다. 작동 중인 세탁기도 건조기도 없었다. 세탁기 하나에 여행의 흔적들을 담고 돈을 넣었다. 가격은 2천원. 돈을 넣고 세탁 버튼을 누르려다 멈칫했다. 표준과 강력 중 하나를 고르라는 안내 때문에. 방황하던 손가락은 표준 버튼 위에 안착했다. 빨래가 끝나고 젖은 옷들을 건조기로 옮겼다. 건조기에도 추가로 2천원을 넣고 동작 버튼을 누르기 전에 또 멈칫. 이번에도 표준을 눌렀다.
혹시나 옷이 망가질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에 내 손가락은 한결같이 표준 버튼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버튼을 누르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강력 버튼을 누르지 못했을까. 강력으로 한다고 해서 돈을 더 내야 하는 것도 아닌데. 강력 세탁이나 강력 건조로 망가질 옷감들도 아닌데. 그냥 트레이닝복일 뿐인데. 왜? 도대체 왜?
물음에 대한 대답은 하나였다. 표준이 안전하니까. 무모한 도전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딱 중간만 가고 싶은 사람이니까.
늘 그렇게 살아왔다. 마음은 항상 강력을 갈망했지만, 그래서 시작했지만, 끝은 항상 표준이었다.
매운 음식이 먹고 싶어 닭발을 주문하면서 순한 맛을 선택하는 것 같이. 새로운 자극이 필요해 나간 모임에서 제일 구석진 자리에 앉는 것 같이. 대책 없이 혼자 배낭여행을 떠나와놓고선 저녁 7시면 숙소에 숨어버리는 것 같이. 그렇게, 결국은 표준을 향해 달렸다.
휴식이 필요하다며 호텔을 잡은 오늘도 그랬다. 울진의 바다 앞 민박집에서도, 안동의 게스트하우스에서도, 나는 충분한 편안함과 안락함을 얻었었다. 그럼에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아무런 고민 없이 호텔을 선택했다. 내게 호텔은 표준이었고 민박이나 게스트하우스는 강력이었다.
여행 12일 차 이른 아침, 14층 호텔 객실의 창 밖으로 일출이 보인다. 세탁기의 강력 버튼을 좀 못 누르면 어떤가. 여수의 아침 바다를 배경으로 이렇게나 황홀한 일출을 보고 있는데. 누구도 쉽게 누르지 못한 강력 버튼을 누르고 지금 여기에 와 있는데.
표준과 강력 사이를 방황하는 손가락처럼 나는 여전히 안전과 도전 사이 어딘가에 머무르고 있다. 어제는 여수의 표준에 젖어들었지만 오늘은 남원의 강력을 향해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