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디자인하지 않았지만 디자인되어 있는

Day12 ; 남원

by 현정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국악이 울려 퍼진다. 역을 벗어나면 각종 민속놀이가 펼쳐지고 있는 광장이 보이고, 그 광장 한가운데에서는 춘향이와 몽룡이 탈을 쓴 직원들이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사진을 찍어준다. 한쪽에서는 기다란 그네를 밀어주는 향단이와 방자가 있다. 내가 생각했던 남원역의 모습은 이랬다.


예상과는 달리 남원의 첫인상은 고즈넉함이었다. 기대에 부풀어 열차에서 내렸는데 국악은 들리지 않았고, 남원역의 유리문을 밀고 나왔을 때 마주한 광장은 택시로 가득 차 있었다. 광장 한쪽에 줄줄이 서있는 택시들이 마치 서울에서 올 몽룡이를 기다리는 춘향이 같았다.




예약한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갔다. 체크인 시간까지는 여유가 조금 있었으나 체크인 전에 짐 보관이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던지라 무거운 배낭을 두고 남원 여행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남원에서 해야 할 일 중 첫 번째는 서점에 들르는 일이었다. 가방에 들어있는 세 권의 책을 모두 읽어버린 탓에 새로 읽을 책이 필요했다.


게스트하우스의 호스트에게 주변에 혹시 서점이 있는지 물었다. 지도 어플로 검색해봤을 때 나오던 서점들은 대부분 참고서를 파는 곳이었던 지라 내가 읽을 만한 책을 파는 서점이 있는지 궁금했다. 주민들만 알고 있는 작은 동네 책방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게스트하우스 호스트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걸어서 2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호스트의 작업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 작은 독립서점을 함께 운영한다고 했다. 서점의 주인은 따로 있고 공간을 공유하는 방식이었다. 서점 주인이 사정상 서울에 가 있어서 최근에는 서점 문을 열지 않고 있지만, 구경하고 싶으면 문을 열어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굳게 잠겨있던 책방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호스트의 말에 의하면 남원에 독립서점은 이곳 한 곳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책방의 오묘한 분위기에 매료됐다. 종류가 많지는 않지만 어쩐지 주인의 취향이 느껴지는 책들의 향연, 이게 진짜 동네 독립서점이구나 싶었다. 찬찬히 책들을 살펴보다가 눈에 들러오는 책 한 권을 골라잡았다. 《디자인하지 않는 디자이너》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이 책과의 인연은 여행을 떠나오기 직전에 시작되었다. 몇 주 전 독서모임을 하나 시작했는데 그 모임에서 이 책을 추천받았다. 제목이 특이해서 나중에 읽어 봐야겠다 생각하고 마음속 장바구니에 담아둔 책이었다. 그런데 여행을 시작하고 이 책을 우연히 두 번이나 마주치게 되었다. 양양의 카페에서, 그리고 안동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난 두 번의 만남과는 달리 이곳에서 마주한 이 책은 구입할 수 있는 책이었다. 남원에서 이 책을 읽으라는 하늘의 계시인가 보다 하고 새빨간 책을 손에 쥐고 나왔다. 그러고 보니 왠지 책의 제목과 이 책방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디자인하려고 애쓰지 않았지만 어쩐지 디자인되어 있는 것 같은 공간이었다.




남원의 시내는 남원과 딱 어울렸다. 상상했던 민속놀이 장터 같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남원역에서 느꼈던 고즈넉함이 동네 곳곳을 감싸고 있었다. 세련된 도시 같기도 하다가 어느 골목에 들어서면 옛날 드라마 세트장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걷다 보니 남원예촌이 등장했고, 남원 여행의 유일한 목적지였던 광한루원에 다다랐다. 춘향이와 몽룡이의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광한루를 중심으로 정원처럼 꾸며져 있는 광한루원. 이곳을 뒷짐 지고 거닐고 있노라면 내가 마치 양갓집 규수가 된 듯한 느낌도 들었다.


광한루원 후문으로 걸어 나오니 분홍빛 노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홍빛 노을 아래에는 작은 정자와 용을 빙 둘러선 채 물을 뿜어대는 분수대도 있었다. 아무도 관람하지 않는 분수쇼를 혼자 바라보면서 남원과 용의 상관관계에 대한 생각에 빠졌다. 왜 하필 용이었을까? 몽룡에서 따온 걸까? 혼자 생각하며 웃었다.


오늘 남원의 여행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나만을 위한 드라마. 우연인 듯 운명인 듯 만난 독립서점과 책 한 권부터 노을을 배경으로 한 분수쇼까지. 《디자인하지 않는 디자이너》라는 책이 왜 오늘 내게 왔는지 알 것 같다. 오늘의 남원은 디자인하지 않았지만 디자인된, 하나의 세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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