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4; 광주
광주로 여행을 오면서 뭘 하면 좋을까, 어딜 구경 가면 좋을까 계속 고민하고 검색해봤는데 딱히 끌리는 것이 없었다. 광주 하면 무등산이라길래 등산을 갈까 했다가 ‘광역시까지 와서 또 산? 그동안 산 실컷 봤잖아’라는 생각에 포기했다. 가보고 싶었던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를 구경 갈까 했는데 ‘야구 시즌도 끝났는데 가서 뭐 해’ 싶었다.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도시이기에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기로 결심했다.
여행을 하면서 기회가 된다면 지역의 원데이 클래스를 꼭 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짐을 더 이상 늘릴 수는 없으니 캔들이나 석고 방향제 같은 걸 만드는 클래스는 일단 패스. 겨울이 다가오기도 하고 코바늘 뜨개질이 원래 배워보고도 싶었으니 뜨개질도 좋을 것 같다. 그 자리에서 바로 먹을 수 있는 베이킹이나 쿠킹클래스도 재밌겠다.
인스타그램을 뒤져서 작은 뜨개 공방을 찾았다. 공방 인테리어도 마음에 쏙 들었다. 몇 시간씩 앉아서 뜨개질만 해도 힐링이 될 것만 같았다. 공방 사장님께 카톡으로 오늘이나 내일 코바늘 수업을 들을 수 있는지 문의했다. 몇 가지의 질문과 답변이 오가던 도중 사장님은 통화를 할 수 있는지 물으셨고, 공방의 무드와 묘하게 닮은 목소리를 가진 사장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친절한 거절이었다. 내가 원하는 수업 내용은 원데이 클래스로 배우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혹시나 내가 상처 받을까 봐 사장님은 털실 뭉치 같은 포근한 목소리로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주시면서, 나중에 서울에 가서라도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차근차근 배워보시는 걸 추천한다고 하셨다.
코바늘은 여행 중에 배우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원데이 클래스를 찾아보던 도중에 마음에 드는 딸기 케이크 만들기 수업을 발견했다. 마침 내가 원하는 시간대에 수업도 있었다. 당일이라 걱정되긴 했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역시나 거절이었다. 베이킹 특성상 클래스 신청은 최소 2일 전까지만 받는다는 것이었다. 예상하긴 했지만 벌써 두 번째 거절이다 보니 속이 조금 상했다. 딸기 케이크가 유난히 더 맛있어 보였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단 밥부터 먹자는 생각에 근처 식당을 검색하다가 동네에서 나름 유명한 애프터눈 티 세트를 판매하는 카페를 발견했다. 심지어 1인도 주문이 가능했다. 미리 전화를 걸어서 예약해두면 그 시간에 맞춰 완벽하게 테이블 세팅까지 해준다는 후기들이 넘쳐났다. 고급 디저트와 나만을 위한 테이블 세팅, 왠지 이 애프터눈 티 세트라면 두 번의 거절로 다친 내 마음을 위로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카페 오픈 시간이 되었길래 전화를 걸어 예약이 가능한지 물었다. 당일 주문도 가능하다는 블로그 글도 읽었었기에 예약이 안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세 번째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얼마 전부터 당일 예약이나 당일 주문은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손이 많이 가는 디저트류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 구성인 데다가 적은 인원으로 운영되는 카페인지라 당일 예약에 대한 부담이 지나치게 커서 몇 달 전부터는 미리 예약된 만큼만 생산한다고 하셨다.
오기가 생겨서 전시회, 콘서트, 뮤지컬, 연극 등등 오늘 관람할 수 있는 게 있는지까지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음에 드는 공연은 오늘 열리지 않았고, 오늘 관람이 가능한 것들은 어쩐지 별로 끌리지 않았다. 결국 나는 오늘 광주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코인세탁실에 가서 옷을 세탁하고, 카페에 가서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좀 허무했다. 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날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무의미한 하루였다.
매운 음식이 당겨서 숙소 바로 앞에 있는 홈플러스에 가서 떡볶이 1인분과 김밥 한 줄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테이블에 사 온 음식과 어제 사다둔 맥주 한 캔을 꺼내놓고 TV를 보며 저녁을 먹는데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여행을 시작하고 공백이 주는 편안함을 잊어버렸었다. 빡빡한 스케줄은 아니었어도 여행을 왔으니 하루에 한 가지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때로는 아무 일 안 하는 일도 필요한 법인데.
아무리 즐겁게 여행을 했다고 한들 집에 돌아가면 여독에 시달린다. 때로는 쉬기 위해 여행을 가서는 오히려 병을 얻어오기도 한다. 그런 걸 생각해 보면 나는 오늘 하루 동안 그동안 쌓였던 여독을 푼 게 아닐까 싶다. 오늘 나에게 세 번의 거절을 안겨준 사장님들께 왠지 모를 감사함이 느껴졌다. 서울과 광주가 너무 닮아있어서 다행이었다. 끼니 걱정, 교통 걱정, 치안 걱정, 커피 걱정 그 어느 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대도시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은 평소 생활의 일요일 같이 그냥 하루를 쉬어가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