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나 외로웠었나 봐

Day15 ; 고창

by 현정

고창으로 친구가 오기로 했다. 혼자 여행을 시작하고 보름 만에 아는 사람을 만나는 날이었다. 소풍 가기 전날처럼 괜히 설레서 잠도 조금 설쳤다. 터미널에 먼저 도착해서 친구를 기다리는데, 왠지 전역하고 돌아오는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이렇게나 즐거운 일인지 몰랐다. 그저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 하나가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멀리서 걸어오는 친구를 발견하고는 신나서 손을 흔들었다. 여행을 떠나오기 직전에 만났던 친구였던지라 얼굴을 못 본 지 20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20일이 마치 20년처럼 느껴졌다.




조금은 서먹하기도 했다. 너무 오랫동안 누군가와 마주 앉아 대화라는 걸 하지 않았던 탓일까. 무슨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평소에는 친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었더라 하는 생각과 함께 10년 지기 친구에게 조금은 낯을 가렸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리는 진짜 20년 만에 만난 동창생처럼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친구가 고창에 산다는 사람에게 얻어온 맛집 리스트 중 가까운 곳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국밥 맛집이라는 터미널 근처 식당에 들어가서 곱창볶음을 시켰다. “국밥 맛집이면 곱창볶음도 맛있겠지”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펴가면서. 어쨌든 곱창볶음은 정말 맛있었다.




숙소까지 가는 버스가 없으면 택시를 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고창은 너무 컸다. 온통 알 수 없는 동네의 이름들만 잔뜩 쓰여 있는 터미널의 시내버스 시간표가 꼭 주기율표 같았다. 터미널에 앉아계신 할머니들께 물어물어 버스의 시간과 탑승법을 알아냈다. 혼자였더라면 그냥 택시를 탔을지도 모르겠다. 일행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원인 모를 용기가 생긴다. 덕분에 택시비를 아껴서 더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친구가 알아본 숙소는 선운산 도립공원에 위치한 유스호스텔이었다. 유스호스텔이라니. 중학생 때 갔었던, 수련회라 칭하지만 극기훈련이라 불리는, 그 정체불명의 여행 이후로 처음 가보는 유형의 숙소였다. 왠지 학창 시절이 떠올라 재미있게 느껴졌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숙소에는 단풍놀이를 온 아줌마, 아저씨들 뿐이었다.


원래는 신관이었지만 지은 지 10년이 넘어 별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새 것인 듯 새 것 아닌 새 것 같은 건물 3층에 방을 배정받았다. 숙소는 기대 이상이었다. 좋은 냄새가 났고, 따뜻했고, 깨끗했다. 방에 욕실 겸 화장실도 딸려 있었고, 각종 샤워용품과 수건, 드라이기도 비치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창 밖으로 보이는 선운산의 단풍이 예술이었다.




잠시 쉬다가 선운산 도립공원 산책에 나섰다. 여행을 하면서 단풍을 워낙 많이 보기도 했고, 선운산이라는 곳 자체가 생소했기 때문에 별 기대 없이 입구에 들어섰다. 그런데 선운산 도립공원은 내가 지금껏 여행하며 돌아다닌 그 어떤 관광지보다 아름다웠다.


기대가 낮았던 탓이었을까? 절대 그건 아니었다. ‘기대가 낮았기 때문에 좋았다’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풍경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내장산이 단풍으로 그렇게 유명하다던데, 이곳은 왜 이렇게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건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어쩌면 나만 몰랐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장어구이와 복분자주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 숙소에 들어가 몸을 잠시 녹이던 우리는 옷을 다시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숙소에 들어올 때부터 밤이 되면 꼭 별을 보러 나오자고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혼자일 때는 여행지의 밤을 그냥 흘려보내기 일쑤였는데, 친구가 있었기에 숙소의 문을 열고 나올 수 있었다. 하늘은 이미 아주 짙은 남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앞을 보고 걷지 않았다. 하늘을 보고 걸었다. 넓디넓은 주차장의 가장 외진 곳으로 향했다. 빛이 있으려면 어둠이 있어야 하기에 어둠을 찾아 걸었다. 별은 점점 더 밝은 빛을 내뿜었다. 별자리라고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저거 북두칠성 아니야? 국자 모양이잖아!”, “카시오페아 아니야? 더블유 모양 같은데.”하며 얕은 지식을 겨뤘다. 숙소에 들어가서 먹기 위해 산 투게더 아이스크림이 별빛에 녹아가고 있었다.




고창이 유난히 아름다웠던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 여행이기에 그랬다. 전라도의 산해진미를 함께할 사람이 있어서 좋았고, 하루 종일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해대며 걸을 수 있어서 좋았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 별을 보러 문을 나설 수 있어서 좋았고, 모르는 길도 물어가며 함께 찾아갈 수 있어서 좋았다. 그냥, 둘이어서 좋았다.


혼자 떠나 온 여행도 물론 좋았지만 왠지 온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배낭여행을 떠나온 지 15일째 되는 날 밤, 녹은 아이스크림을 퍼먹던 분홍색 플라스틱 스푼을 입에 물고 친구에게 말했다.


“나 외로웠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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