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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okie Run Sep 14. 2019

돈 많은 백수가 적성이 아닐 수 있었다.

퇴사생, 방학이 끝났음을 선언하다.


대책 없이 퇴사한 후 2개월 간은, 금전적 여유만 있다면 백수생활이 딱 내 적성이라 생각했다.


역사,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읽고 싶던 책을 읽었고, 특히 좋아하는 책은 재독하는 여유도 부렸다.


9,900원짜리 땡처리 항공권 티켓을 끊어 제주도에 여행도 다녀왔다. 편도 9,900원, 왕복 6만 원.


아무 일을 하지 않았더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게 좋았다.


'일하면서 모아뒀던 돈은 한정되어 있고, 부동산이나 별다른 자산도 없고, 부모님께 용돈 달라고 손 벌리기에는 내 몸 하나쯤은 내가 챙길 수 있어야 할 어른이 되어버렸는데, 정말 돈 많은 백수가 내 적성이면 어떡하지? 이제야 찾은 내 적성의 길을 못 걷나?'라는 고민이 생길 정도로 백수생활이 몸에 딱 붙는, 괜찮은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3개월의 백수생활 후, 돈 많은 백수는 내 적성이 아님을 깨달았다.


회사 다닐 때는 책을 맘껏 읽는 게 소원이었는데, 그것도 2개월 정도 해보니 지루해지더라.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책을 읽어 지식이 쌓이는 건 좋았지만, input만 있고 output이 없었다. 내 생각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상대방의 생각도 들어보며 관점을 더 넓히고 싶어도, 이러한 대화를 옆에 두고 나눌 만한 사람이 없었다. 평소에 주변 사람들과 무슨 대화를 했었는지 되돌아보니 회사에서 일하며 느꼈던 감정 토로와 커리어 고민이 대부분이더라. 그러다 갑자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윤리는 무슨 가치가 있는지'와 같은 이야기를 꺼내 논하자니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대책 없이 퇴사했다는 이야기보다 더 무겁고 또 한 편으로는 오글거리는(?) 주제로 다가왔다. 여태껏 술이나 커피를 마시며 흘려보낸 감정적인 대화들과는 다르게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논하고 싶어 그랬던 것도 한 몫한 것 같다.


책을 읽고 혼자 고민하는 것은 외로운 일이었고, 뭔가를 알게 된다 하더라도 써먹을 곳이 없으니 허무감이 몰려왔다. 허무감은 곧 무기력감이 되었고, 백수생활 3개월 차부터는 '모든 게 무의미하니 잠이나 자자'는 듯 잠만 실컷 잤다.


이따금씩 몰려오는 이전 직장에 대한 분노에 외로움, 허무감, 무기력감이 더해져 부정적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루하루를 잠으로 흘려보내던 와중, '이 정도면 이전 직장들에서의 경험에 대한 후유증으로 겪을 감정들은 충분히 느끼지 않았나? 이런 감정들을 떠나보내지 않고 계속 이런 식으로 산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무슨 이유에서든 오히려 이 감정들을 억지로 붙잡고 있는 꼴이 되는 건 아닐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리고 게으른 나와는 다르게 부지런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보자니 '나잇값'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그놈의 나잇값. '29살이면 이만큼, 30살이면 이~만큼, 40살이면 이~~만큼 성숙해야 한다'의 기준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잇값'이라는 표현은 '내가 살아온 세월 값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성숙함은 갖춰야 한다'는 어떠한 의무감, 부담감을 주었다. 물론 지식과 경험이 풍부해도 나잇값을 못 하는 사람들도 꽤나 있지만 나는 '나잇값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시간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기만 한다면 나는 곧 '나잇값을 못 하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아, 어떤 면에서든 조금은 더 지식을 쌓고, 경험을 쌓고, 그 과정에서 성숙해져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이제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떨쳐내고 움직여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내가 알게 되는 것과 경험하는 것들이 어딘가에 쓰임 받는 것. 그것이 내가 지식을 쌓든 무엇을 하든 그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내 존재가치에 의미를 가져다줄 것만 같았다.  



해외 대학교에서는 5월부터 8월까지가 방학인 만큼 나도 퇴사 후 3개월 간 쉬었으면 휴식을 충분히 취했다며, 이제는 '개학'하기로 했다.


우선 부정적인 감정들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간간히 이전 직장에 대한 분노가 몰려올 때면, 내가 하루 중 가장 많이 머무르는 곳 바로 근처에 둔 1kg, 2kg짜리 아령을 들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변환시킴과 동시에 내 몸과 마음이 겉과 속으로 조금 더 건강해진다는 생각에 은근 뿌듯해졌다.


그리고 프로그래밍 언어 공부를 시작했다. '한국은 더 이상 아닐까? 해외로 가야 하나?'라는 생각과 함께 해외 채용공고를 찾아보던 와중, 내가 속해있던 분야에서도 Big Data가 화두가 되며 점점 프로그래밍 언어 실력을 갖춘 인재를 찾는 공고들이 보였다. 프로그래밍 언어는 고등학교 시절 C++를 배웠던 적이 있기에 아주 생소하지는 않았고, 수학 문제를 고민하고 풀어 나가며 해결하는 것과 비슷해 작은 성취감도 느낄 수 있으며, 자격증을 취득한다면 뭔가를 해냈다는 성취 및 인정 욕구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아 여러모로 공부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됐다. 그래서 약 3주간 프로그래밍 언어 입문용으로 좋다는 파이썬을 공부했고,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 외에는 집 앞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커피값이라도 벌어야겠다며 알바 공고들을 보던 와중, 집 가까이에 있는 영어 카페에서 정치, 경제, 사회 등에 대한 이슈에 대해 아티클을 읽고 그에 관한 논제를 정해 토론을 이끌 사람을 찾는다는 구인공고가 나왔다. 보수가 적지만 어떠한 주제에 대해 읽은 후 내가 고민하고 싶은 포인트에 대해 논제를 던져 여러 사람들과 함께 토론할 수 있으며, Time commitment도 일주일에 두 번, 총 6시간이라는 점도 괜찮았다. 돈을 벌고 싶다면 SAT나 AP를 가르치거나 과외를 하는 게 훨씬 낫지만, 지금은 '내가 아는 것을 가르치는 것’에서 그치기보다는 '내가 아는 것에 새로운 지식과 생각을 더해가는 삶'을 원한다는 점에서도 이 알바가 괜찮게 다가왔다. (그리고 현재의 알바는 금전적으로 안주할 만큼의 돈벌이가 안 되기에,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해야겠어'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무엇이든 직접 경험해봐야 배우고 깨닫는 나는, 금전적으로 여유 있는 백수생활도 경험을 해봄으로써 돈 많은 백수가 내 적성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었다. 돈 많은 백수생활은 시간과 돈에 구애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걸 언제든지 여유롭게 한다는 점에서 좋았으나, 내가 알게 되는 것과 경험하는 그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쓰임새가 없다는 생각은 허무감과 무기력감을 가져왔다. 결국 내 삶의 동력은 뭔가를 학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적용하는 것. 이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돈 많은 백수생활은 내가 평생 누리고 싶은 것은 아닌 것으로 결론을 내렸고, 퇴사생의 방학이 끝났음을 스스로에게 선언하며 '개학'하기로 했다.


'나에게 완벽한 회사'란 없겠지만, '우리 이 정도면 서로 맞춰 가볼 수 있을 것 같아요!'가 될 만한 회사를 찾고 있어요.



P.S. on 자격증

자격증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 편이기에 자격증 컬렉터는 아니다. 이번에 파이썬 자격증을 취득하기는 했으나 프로그래밍 언어에 대한 입문용으로, 기초적 및 포괄적으로 그 분야에서 어떤 것들을 알아야 할지에 대한 가이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리고 작은 성취감이 필요했기에 준비했던 게 크다. 하지만 어떤 하나의 분야의 특정한 상황에서 필요한 데이터를 분석하기에는 이러한 자격증을 준비하며 공부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인다. 그런 만큼 자격증을 취득한다는 것에만 의미를 두지 말고, 필요한 기본 지식을 어느 정도 갖췄다고 생각된다면 본인의 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지식 및 기술을 갖출 수 있도록 관심 있는 세부 분야를 정해 별도로 추가 학습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 누구에게도 자격증 취득 그 자체가 목표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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