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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습

by 꿈꾸는 momo

엄마에게 기대는 게 왠지 싫었다.

외할머니까지 모시고 살게 된 엄마에게 짐이 되는 것도 싫었지만, 그 장소에 가는 게 불편했던 것 같다. 비 오는 날, 질펀해진 흙길에 빠져 엉망이 되어버린 신발처럼 축축한 기억들이 모여 있는 곳. 떠나온 둥지가 애틋하다가도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기는 싫은.


계절의 변화에 오롯이 노출된 주택은 봄도 추웠고, 여름은 더웠고, 가을, 겨울 내내 춥고 추운 곳이었다. 기름값이 많이 든다고 바닥에 전기필름을 깔아 시공한 탓이었다. 한겨울엔 거실에서도 외투를 입고 있어야 했다.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사람이 없으면 바닥도 데우지 않으니 온기가 유지되지 못했다. 자는 방도 마찬가지였다. 단열이 부족한 창에는 외풍이 바람소리와 함께 와글와글 몰려들었고, 뜨거운 방바닥 위에서도 코끝은 시렸다. 화장실은 아예 난방이 되지 않으니 들어가기가 무서웠다. 영하의 온도에 그대로 노출된 변기에 앉는 순간, 내 체온은 빠른 열전도율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심장까지 훅 떨어지는 느낌. 찬 공기 속에 뻣뻣해진 손놀림으로 가재도구를 정리하는 것은 기분까지 뻣뻣하게 했다. 아이가 4개월이 될 때까지 망설였다. 엄마는 엄마대로 오라는 소리를 못했다. 아프게 태어난 아이를 거두기엔 불편한 곳이었으니까 쉽게, 오라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장루를 달고 집으로 온 아이를, 나는 악착같이 간호했다. 배 밖으로 탈출한 T자의 소장에서는 쉬지 않고 변이 흘러나왔다. 큰창자가 없으니 수분을 흡수하지 못하는 그곳에서는 모유를 먹을 때마다 즉각 분비물을 뿜어냈다. 그걸 담고 있는 장루를 3-4일 만에 갈아줘야 했다. 피부를 소독하고, 깨끗한 장루를 특수 접착제로 부착하는 일은 남편이 했다. 차가운 알코올 솜으로 피부를 닦아낼 때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었다. 나는 아이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고, 남편은 실수 없이 장루교체 작업을 하느라 진땀을 뺐다. 처음엔 새끼손가락 한 마디쯤 되던 소장이 점점 길어져 나와 나중에는 검지만큼 굵고 길어졌다. 장루 주변의 피부가 점점 붉어졌고, 작업도 어려워졌다. 100일, 드디어 장루복원술을 했다. 아이의 첫 방귀가 그렇게 기쁜 소리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제 뭔가 끝난 것 같아서 기뻤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는 하루에, 많게는 30번 이상 묽은 변을 보았다. 나는 눈만 뜨면, 아니 밤 중에도 기저귀를 갈았다. 잦은 변에 발진이 생겨 천 기저귀를 일회용과 번갈아 썼다. 물티슈 대신 거즈를 따뜻한 물에 적셔 닦아냈다. 온갖 발진 크림을 다 썼다. 대장이 없는 아이의 변은 냄새는 없었지만 치우기가 곤란했다. 아이의 엉덩이에서 찍 변을 내뿜는 소리만 들리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졌다. 잠이 덜 깬 눈을 비비고 일어나 따뜻한 물을 떠서 거즈를 적시고 있으면 묵직한 몸이 흔들거렸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밤중에 간 기저귀가 예닐곱 개쯤 쌓여 있었다.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면 좀 더 견딜만했을까. 그 끝을 알 수 없어 더 괴로웠다.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는 듯한 느낌을, 잠을 깨던 어둠 속에서 자주 느꼈다.


"병원에 있었을 때를 생각하고 감사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면 늘 성경 같은 답을 이야기하셨다. 엄마니까 그러는 걸 알면서도 속상했다. 그러다 지독한 감기몸살이 왔다. 도움이 필요했다. 결국 친정으로 향했다. 이불, 베개, 온수매트에 아이 짐까지 한가득 싣고. 까치발로 바닥을 디디듯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불편했던 건 아주 잠시였다. 코끝 시린 실내 공기도, 불편한 생활공간도 금세 적응되었다. 엄마가 차려주는 세끼 밥만으로도 나는 살만해졌다. 따뜻한 쑥국 한 그릇. 된장찌개와 나물들. 계절을 감각할 수 있는 바람과 색과 소리들이 나를 달래줬다. 컹컹거리는 고라니의 울음소리와 꼭두새벽부터 부지런히 울어대는 수탉소리가 그저 정겨웠다. 게다가 외할머니는 육아고수였다. 아이가 밤에 깨 이유 없이 울 때, 엄마와 나도 쩔쩔매는 것을 보다 못한 외할머니가 데려갔다. 어찌나 아이를 잘 보시는지, 외할머니 손에서 금세 울음을 멈췄다. 셋이서 돌아가며 아이를 봐주고, 업어주고 재웠다. 어떤 날은 외할머니 곁에서 아이는 놀다 잠들었다.


"앞집개야 짖지 마라. 뒷집개도 짖지 마라. 우리 00이 잘도 잔다."


견디는 마음으로 입을 악 다물고 한숨 쉬며 육아하던 나는 아이 곁에서 쉴 새 없이 말하고, 노래하고, 웃는 외할머니를 보며 새로운 걸 배웠다. 육아는 힘든 과업을 하는 게 아니라, 한 존재를 사랑하고 기뻐하는 일이란 걸.


엄마는 더 이상 내게 교훈 같은 말을 던지지 않았다. 아이가 한밤 중에 뒤척이거나 변을 보면, 자다가도 반사적으로 일어나 기저귀를 갈아주는 날 보며 엄마는 대단하다 했다. 열감기에 약을 먹이다 토해내는 아이를 보며 오히려 엄마는 사색이 되어 "응급실 가자." 하며 발을 동동거렸다. 정작 내가 어릴 때는 병원 한 번 데려가본 적이 없으면서. 엄마의 그런 모습이 새로웠다.


아직도 엄마는 누군가가 나에 대해 물으면 "진짜 애 키운다고 고생했어요. 혼자서 정말 대단하다 생각해요."하고 그때를 떠올렸다. 힘든 걸 무던하게 넘기는 내 모습이 엄마도 낯설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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