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유증
한강의 소설을 읽고 난 후, 갑자기 나의 모든 일상이 소설같이 느껴져. 후유증인 것 같다.
생리통으로 지끈한 아랫배를 문지르며 일찍 집으로 왔다. 배고프지 않았지만 뭔가를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식탁 위에 올려진 식빵이 보여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가 역시 후회했다. 상비약으로 챙겨둔 활명수를 꺼내 먹었다. 일주일에 두 번은 먹게 되는 것 같다.
밀가루를 끊어야지.
해독주스를 다시 만들어 먹어야겠어.
커피도 끊어야 할까....
오늘 저녁은 안 먹어도 되겠다.
쉬려고 했는데 소화가 안 돼서 누울 수 없었다. 아침 식사 후 쌓아둔 설거지가 보인다. 건조기에서 꺼낸 빨랫감은 소파 위에 그대로 있다. 어제 놀다 흘린 아이들의 피규어와 남편이 TV를 보며 벗어두었을 양말이 보인다. 헨젤과 그레텔이 흘린 빵조각을 하나씩 줍듯 허리를 굽혀 그것들을 주웠다. 식탁 밑에 흘린 견과류 몇 알과 요거트 범벅이 된 블루베리의 질감을 느끼며...
빨래를 개어놓고 빨랫감들을 다시 세탁기에 넣는다. 조금 있다 아이들이 돌아오면 입었던 옷들을 벗어 같이 넣고 돌려야지. 아이들이 왔다. 손을 씻고 하는 것은 인터넷 게임. 집중한다. 아마도 내가 밥 먹자고 외치기 전에는 그럴 것이다. 세 컵의 쌀을 씻는다. 밥솥에 넣고 취사를 누른다. 오늘은 무슨 반찬을 해야 할까. 먹을 게 있나? 시켜 먹을까? 핸드폰을 열어 배달음식을 둘러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냉장고에 있는 야채들을 꺼내 햄볶음밥을 해야겠다. 카톡이 왔다. 며칠 전 촬영한 X-ray 흉부검사결과가 나왔다. 괜찮다. 정상이다. 나는 정말 정상일까? 정상이고 싶다. 어느 막연한 두려움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게 다시 머리를 흔든다. 알림장 앱이 울린다.
받아쓰기 틀린 것 2-3회 쓰기.
아, 오늘이 받아쓰기하는 날이었구나. 챙겨보지 못하고 보냈다. 아이들 가방에서 받아쓰기 공책을 꺼냈다. 각각 30점과 40점을 받았다. 완성된 문장 가운데 틀린 받침이 한 두 개씩 보인다. 이 정도면 괜찮다 생각한다.
받아쓰기했어? 어땠어?
물어본다. 아이들은 3개 맞았어. 4개 맞았어. 쿨하게 대답한다. 그러면 되었다. 그래도 나중에 숙제는 챙겨봐 줘야지. 밥이 되는 냄새가 난다. 야채를 준비해야 한다. 대파를 잘게 썰어 기름에 볶고 향을 낸다. 이틀 전 데쳐놓고 남은 통조림 햄을 꺼내 잘게 썬다. 완두콩, 브로콜리, 당근... 야채가 많아도 햄만 들어가면 분명 잘 먹을 것이다. 음식을 할 때 가장 어려운 게 양조절이다. 먹는 양이 워낙 적은 내 입장에서 생각하다 보니 그렇다. 적게 먹는데 왜 소화가 안 되는지 모르겠다. 단골 옷가게에서 제일 작은 사이즈라는 바지가 헐렁해서 몸무게를 재어보니 살이 또 빠졌다. 병원에 가봐야 하나. 싫다. 병원은 싫다. 주걱으로 세 번 밥을 퍼 볶음팬에 넣는다. 세 아이만 먹을 테니까. 야채가 많으니 밥양은 많을 필요가... 그러다 한 주걱을 더 넣는다. 첫째의 식욕이 부쩍 늘었다. 신발 사이즈가 나를 앞서 간지는 꽤 되었고 곧 내 몸무게를 따라 올 기세다. 먹고 돌아서면 배고프다는 아이를 떠올린다. 세 아들이 중고등학생이 되면 우리 집 식비는 얼마나 나갈까. 재미있다. 턱선이 달라지고 여드름이 난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새까만 옷만 입고 등이 굽은 세 아들을 보는 기분은 어떨까. 남자 냄새는...
밥 먹자.
아이들은 기꺼이 환호하며 식탁을 훔쳐본다. 분주하게 손을 씻고 물을 털며 나온다. 맛있다며 먹는다. 밥솥에 남은 밥을 뜨다 김이 오르는 흰밥에 식욕이 돈다. 콩자반과 미역나물과 파김치를 꺼낸다. 한 주걱 퍼 놓은 밥은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흰 밥을 크게 한 숟갈 퍼서 꼭꼭 씹어먹을 거다. 맛있게.... 맛있게.... 두 숟갈을 먹고 포만감을 느낀다. 일부러 더 꼭꼭, 힘차게 씹는다. 검은 콩자반이 어금니에서 갈린다. 아주 오랫동안 그것을 씹으며 삼키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