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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니즘에 이골이 난 돌멩이의 잃어버린 일기장

041. 퇴사 4주 차 - 밥 벌이 하기

by 한량돌

몇 달 이상 없이 푹 쉬어도 될 만큼 돈 잘 모아서 퇴사했으면 좋으련만.. 텅텅텅장이라. 이젠 달달했던 한량 생활을 끝내야만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자나스에게 여행 후원금도 얼른 돌려줘야 하고, 향후 계획된 여행을 위해 곳간을 채워야 한다.

또한 내년 초에 아파트 전세 계약이 끝나면 연장 없이 이사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나에게 더 어울리는 곳으로 가려면 뭐.. 지금은 방법이 없다.


다시, 많이 일하고 적게 놀아야 한다.






# 함께하면 더 좋을 추천곡

https://www.youtube.com/watch?v=u4r8ZpnkTa0

<150524 루시아 (Lucia, 심규선) - 데미안 @그린플러그드 - sk You>






요 며칠 여기저기 나름의 조건에 맞는 일자리를 찾다 보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은 얼마나 축복받은 일일까 생각하게 된다.

그것 역시 얼마든지 고될지언정,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맞다.

더 이상 환상으로만 미뤄두지 말고 방법을 찾자.. 방법을...




[의류 물류센터 대작전]


제일 처음 구한 일자리는 당근에서 찾은 일일 알바로, 거주지 근처에 있는 의류 창고에서 하는 상품 검수 및 상차 작업이었다. 시간은 16시 ~ 익일 1시까지이고 일당은 세전 14만 원.


처음 가는 일터. 오랜만에 느껴보는 낯선 불안감이 엄습한다.

3주 간의 무작정 휴식이 너무 길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


일은 얼마큼 고될까?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어떤 것들을 느끼게 될까?


물류센터는 서울 나갈 때 종종 지나다니던 길목에 위치해 있다. 웬만한 사람은 들으면 알만한 그 브랜드. 여기서 알바를 하다니. 정말 별 일을 다 해보는구나 ㅋㅋ..


출근하자마자 지문 등록을 하고 뭔가에 서명을 한다. 일 하러 온 사람들을 보니 또래도 있고 어르신들도 있다.

이어서 경험자와 비경험자를 섞어 업무팀을 나눈다.

손에는 개인 정보 단말기(PDA, Personal Digital Assistant)가 쥐어지고, 쌓여있는 옷들의 바코드를 찍으며 각 지점으로 보낼 옷들을 검수한다.

이후 관리자에게 가득 찬 의류 박스를 전달하고 관리자는 최종 검수 후 박스를 닫는다. 그렇게 반복.


마치 고전전략게임 스타크래프트의 일꾼처럼 미네랄을 왔다 갔다 하는 일이었다.

다운로드.gif



이게 뭐지...?

악에 받치도록 택배 박스와 송장에 묻혀 살던 나에게는 너무 쉬운 일이다.


대기업은 역시 일용직도 다른 건가. 누가 와도 착착 업무처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관리자들은 파이팅이 넘치고 친절했다. 일당제 사람들과 하도 많이 접촉해서 그런 건가.

KakaoTalk_20250403_102812381_02.jpg 발은 좀 아프네



별다른 소음 없이 식사 시간이 되었다. 석식 지원은 되지 않아 근처 밥집을 찾았다. 편의점 식으로 한 끼 때우고 싶지는 않았다.

KakaoTalk_20250403_124332969.jpg 11,000원짜리 고추장불고기인데 참 맛있었다. 밥 더 주시겠다고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한 그릇만 뚝딱하고 나왔다.


밥을 먹던 중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던걸 이제 확인한다.

뭐지? 아.. 그제 밤, 술 김에 지원한 '인삼 심기' 알바다. (취하면 겁을 상실하는)

몇 번 통화 대기음이 이어지다가 상대가 전화를 받는다.

상대는 말한다. 멀리 사는데 여기까지 올 수 있겠냐. 아주머니들이 하기에도 고된 일인데 가능하겠냐.

나는 말했다. 차가 있어서 괜찮다. 일단 해봐야 아는 거 아니겠냐고 답했다.

그럼 내일 8시까지 오라고 한다.


그래 잘 됐어. 살면서 내가 인삼을 언제 심어보겠나. ㅋㅋㅋ...



이후로도 시간은 잘 갔다. (아니, dirty 안 가더라)

중간중간 휴식 시간도 부여받았다.


12시쯤 되었을까. 오늘 할당량을 다 끝냈다는 방송이 나온다.

그런데 약간의 잔업이 필요하다고 한다. 불가능한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라고 한다.

아무도 안 된다는 사람이 없다.

아아.. 일찍 일어나서 인삼 밭 가야 하는데.. 그냥 나도 잔업에 참여하기로 한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각지로 배송해 줄 물류 기사님들이 물류 센터로 집결한다.

상차팀도 새로 꾸려졌다. 새벽 1시인데도 경험자들은 여전히 파이팅 넘친다. 체계적이고 안전하게 움직인다.

기사님들도 나와서 같이 박스들을 싣는다.


후다닥 상차가 끝나고 퇴근 지시가 내려진다. 관리자가 내게 와서는 내일도 나올 수 있는지 묻는다.

(아,, 저는 내일 인삼 심으러 가야 합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일터가 정해지지 않았을 때 아쉬운 대로 다시 와서 일해도 괜찮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체계 잡힌 인력 관리 체계.

자동화된 로봇들과 거대한 물류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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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직장이었던 도자기 브랜드도 이렇게 체계 잡힌 물류센터로 발전해 갔을까?

그러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했을까? 생각에 잠기며 집으로 향한다.


글로 돈 벌기 전까진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불안정하고 불만족스러운 밥벌이 생활을 잘 견뎌낼 수 있을까.

그리고 결국.. 글로 돈 버는 게 훨씬 머리 아픈 일이겠지...


아무튼 다 양분이 될 거야. 살면서 하는 갖은 경험은.

그것들은 내 가슴속에 녹아서 내 글이 더 맛깔나지도록 돕겠지.


그나저나 5월부터는 일용직으로만 살 수 없는데.

둘레길이니 공원 관리니 하는 건 채용 소식이 없다. 일감이 있어도 자원봉사식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누워있다 보니 시간은 벌써 새벽 3시.

휴, 일단 자자. 고생 많았다 돌멩아.





[인삼 심기 대작전]



새벽같이 일어나 주소지에 도착해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검은색 차양막은 보이지 않았다. 외국 인력도 없었다.

평생 군 생활을 하고 퇴직한 지 몇 년 안 된 검은 피부의 어르신 한 분 만이 오늘 같이 일 할 동료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아저씨 둘이 더 왔다.

고용주와 서로 회장님, 대감님 하는 걸 보니 고용주 지인인 것 같다.


알고 보니 상품화할 인삼을 심는 일이 아니라, 본인들 산에 본인들이 먹을 삼을 심는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서 사람을 구했던 것이다. 산양삼? 장뇌삼? 그런 거지.


작업 방법은 이러했다. 어르신들이 삼을 심을 위치를 잡고 고랑을 파면 나는 그 뒤를 쫓아 작은 삼 뿌리들을 심기만 하면 된다. 이후 고랑을 잘 덮고 꾹꾹 밟아준 뒤 낙엽으로 잘 덮어둔다.

KakaoTalk_20250403_102812381.jpg 머리가 북쪽으로 향하게 눕히면 된다고 합니다.


무릎과 허리가 부하가 오긴 했지만 이 정도면 뭐, 별 거 아니다 싶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공기를 마시고 영양 듬뿍한 검은흙을 만지는 것이 기분이 참 좋았다.

아, 야생 노루 두 마리도 보았다. 한낮에 껑충껑충. 신기했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고용주 아주머니가 차려준 밥상은 긴긴 자취 생활 중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한 백반 한 상이 었다.

해남인지 여수인지서 자랐다는 봄 파로 담근 새큼한 파김치만 있어도 두 그릇은 쉽게 뚝딱 할 것 같았다.


사람들이 젊어서 왜 일당 알바를 하고 있는지 물었다.

이런저런 경험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결정적으로는 앞으로 이 지역에 살고 싶어서

여러 번 발자국을 찍다 보면 어떤 기회라도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라고 답했다.



KakaoTalk_20250403_102812381_01.jpg 심긴 심었는데 어디에 심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삼을 다 심으니 시간이 오후 3시쯤 되었을까?

약속된 것보다 조금 이르게 일이 끝나서 따로 시키는 일을 했다.

산에 있는 장작을 실어 나르고, 화초에 물을 주고, 각종 짐들을 옮겼다.(허리 꺾이는 줄 알았네)


어쨌든 시간은 훨훨 날아간다. 일은 다 끝났다.

끝으로 제공된 포도즙을 마시면서 일당도 바로 받았다.


날씨도 일하기 참 좋았다.

비가 예보되어 있었는데 오히려 따가운 해만 적절히 가려주는 구름만 가득한 날이었다.


돌아가기 전 인사를 하는데 고용주 아주머니가 말한다.


- 아까 한 말들 진심이니까 사무실 와서 일 배워요.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이죠?




고용주 아주머니는 여행사를 운영한다고 했다.

호구조사, 경력, 취미 생활, 성격에 대해 나와 이런저런 대화를 했는데

이렇게 일당직 하기엔 아깝다면서 자기 회사에 와서 일을 배우라는 것이다. (에?)


이분이 그냥 농을 하는 건가 확인 차 몇 번 되물었는데 진짜인 것 같다.

현장에서 몇 날 몇 시에 찾아가면 좋을지 확정을 지었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는 못했다. (더 물어보면 실례일 것 같았다.)


따로 문자를 주시면 사무실로 찾아뵙겠다고 말하고 집으로 향했다..!

(역시역시 집 안에서 뒹굴게 아니라 밖에서 나돌아야 기회가 생긴다!)


집에 와서 회사 이름을 찾아보니 꽤 규모가 큰 여행사던데..?

대표자 얼굴도 나와있어서 보니, 아까 그 아주머니가 맞다. 나한테 파김치 주던 그 아주머니.


... 흐으음......



일단 내일은 잠깐 쉬어가야겠다.

아침마다 달리기를 계속했더니 허리부터 발목까지 회복할 새가 없네.

몸 상태를 만들어야 또 일을 하고 글을 쓰지.


집에 도착하고 씻고 나서 피로감에 일단 잠을 청했다.

몇 편의 꿈들을 감상하고 일어난 시간은 저녁 9시경.

혹시..? 핸드폰을 들어 확인한다.


그 아주머니, 아니 그 대표님에게 명함이 와 있다.

언제쯤 찾아뵈면 될지 문자를 남긴다.



아아,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격변할지 모르는 밤이 흐른다.






출처

1. 대문사진

<a href="https://pixabay.com/ko//?utm_source=link-attribution&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image&utm_content=5557864"> Pixabay </a>로부터 입수된 <a href="https://pixabay.com/ko/users/chiec_dep-18183306/?utm_source=link-attribution&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image&utm_content=5557864"> Phuong Nguyen </a>님의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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