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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니즘에 이골이 난 돌멩이의 잃어버린 일기장

042. 퇴사 5주 차 - 밥 벌이 하기

by 한량돌

오늘은 쉬어가는 날.

갑작스러운 전화 소리에 느지막이 잠에서 깼다. 핸드폰에 찍힌 번호는 031.

앗..!? 얼마 전 명함 받았던 그 여행사 인가?? 아니면 이전에 채용 관련 문의를 했던 (지방의 걷기 프로그램을 주관하는) 그 비영리 단체?

떨리는 마음에 전화를 받는다. 오, 후자였다. 사람을 구하는 건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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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그건 아니었다.. 채용 문의 하는 김에 구매했던 '걷기 스탬프북'이 있는데, 그 책 수령 관련 건으로 연락을 준 것이었다.

스탬프북이 준비되었는데 택배로 받으면 착불비가 드니 혹시 거주지역이 멀지 않다면 직접 수령하는 게 어떻겠냐고 한다.

나는 감사를 표하고 시간을 내어 방문 수령 하겠다고 했다.


뎅장. 좋다 말았네.






# 함께 하면 더욱 좋을 플레이리스트

https://www.youtube.com/watch?v=KozOAazqL8I

<[Playlist] 사각사각 글쓰기, 봄이 오는 따스한 창가에서 - Sound Still>






대도시에 위치한 여행사를 방문해 볼지 말지 잠깐의 고민을 하는 동안

완충된 몸을 의미 없이 놀릴 수 없으니 다음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이번에 찾은 일은 한옥 펜션 리모델링 일이었다.

이번 근무지도 내가 터를 잡길 원하던 그 지역. 시간은 10시 ~ 16시까지. 시급은 15,000원. 교통비도 출근할 때마다 5천 원씩 지원! 당연히 점심도 제공한다.

근무 시간은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었고, 출근이 어려운 날에는 최대한 맞춰주겠다고 한다.


한 달 차 백수인 나야 뭐 근무 시간이야 충분히 맞춰줄 수 있고, 남들 놀 때 일하고 남들 일할 때 노는 삶을 좋아하는 나에게 딱 맞는 조건이다.

벌이가 약간 귀엽긴 하지만 5월까지 일이 계속 있을 거라는 안내가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말이 이 일 저 일 체험해 보는 게 즐겁다고 하는 거지,, 일 구하는 게 얼매나 스트레스여..)

씀씀이 줄이고 정 부족하면 쉬는 날 의류물류센터 가서 일하면 되지 뭐.

그리고 아침 운동을 하기에도 출근 시간이 여유 있고, 일 끝나고 돌아와서도 글쓰기나 영상 편집에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가 확보된다는 점이 참 마음에 든다.


또박또박 간단하지만 정성을 다해 구인공고에 글을 남긴다.

몇 시간 후, 전화가 왔다.


- 돌멩씨 되시죠? 한 번 뵙고 싶은데요! 지원서 보내주신 거에 감동했어요.

(대체 어떤 지원서들을 받아 온 거야..?)


지금까지 무슨 일이든 꼭 1년 이상 했던 걸 좋게 봐준 건가.

아니면 전라도에서 3년 정도 철골 용접과 내부 인테리어를 했던 경력을 좋게 봐준 건가. (역시 뭐든지 해놓으면 무기가 되는구만!)


나는 내일 당장 달려가겠다고 말하고 통화를 마무리했다.



집에서 펜션까지는 차로 20분 정도가 소요됐다. 방지턱이 많은 시골길. 기분이 벌써 랄랄라 하다.

도착해 보니 펜션 부지가 꽤 넓다. 그런데 중간중간 완공 되지 않은 한옥도 있고 주변이 좀 을씨년스럽다.

사업을 시작한 지 5년 정도 된 곳인데, 그간 코로나의 영향 등 이런저런 사정으로 운영이 중지되었었다고 한다.


고용주는 펜션의 주인은 아니었고 대행사의 대표였다. 딱 보기에도 젊어 보이는 30대 남자.

일단 사무실로 들어가서 믹스 커피를 한 잔 받았다.


대표님은 나와 나이 차가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라고 한다.)

일찍이 수원 쪽에 두 곳의 에어비앤비(숙박 예약 플랫폼)를 운영하고 있었고, 직장에서 퇴사한 이후로는 강원도 쪽에서 펜션 대행업을 하다가 이 지역으로 올해 넘어왔다고 했다.

이 한옥 펜션 단지를 맡게 된 것은 지인의 소개 같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발품을 팔아서 여기 주인 회장(?)에게 찾아가 자신 있으니 맡겨달라고 했다고 한다. (남잔데 아주?)


그는 내게 큰 화이트보드판에 적힌 사업 계획 전반을 보여주었다. 그는 일용 잡부보다는 숙박업 관리 측면에서 비전을 가지고 함께 일 할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이미 숙박 대행업 A~Z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 그런가.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펜션 운영을 준비하는 그림이 머리에 그려졌다.

정말이지 여러 갈래로 발전 가능성이 있는 펜션 단지였다.

여긴 귀여운 강아지들도 많고 승마체험을 할 수 있는 말도 있다. (그리고 박쥐도 가끔 출몰한다고 한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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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운영 계획을 설명하는 동안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들이 보였다.

재밌다. 참 다행이다.


이 사람을 100% 신뢰할 수는 없지만 일단은 좋다.

여행사에 들어가기보다는(채용 확정된 것도 아니지만) 만약 이 사람 밑에서 성장할 수 있다면

한 시간 가까이 되는 통근길을 오가며 남보다 잘하기 위한 성과 경쟁, 불규칙한 근무 환경 속에 놓일 수 있는 여행사보다는

내 창작 시간이 보장되는 숙박업을 배우는 게 조금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찍이 공간 대여에 관한 꿈을 가지고 있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한옥이라니!!


그래서 당분간 내 목표는 여기 대표님에게 매일매일 감동을 주는 것이다.


딱.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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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변 정리였다.

(현재 펜션은 가 오픈 단계로, 일부 객실만 열려있는 상태다.)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주변을 정돈하고 추가로 객실을 오픈하기 위해 짐들을 정리했다.

오늘은 관리동으로 객실에 필요 없는 물품들을 옮기는 일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다.


아, 나와 함께 출근한 아저씨 한 사람이 있다.

자신도 숙박업을 하고 있고(아닌가. 지금은 안 하는 건가. 헷갈) 관련 산업으로 중국 출장을 자주 갔다는 그.

일단 이 아저씨도 오래 일을 할 것 같아서 별명을 붙이겠다. 허세가 조금 있으니 이분은 '허저씨'로 하자.


이 아저씨는 나에게도 대표님에게도 이래저래 도움이 많이 된다.

나에게는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얘기해 주는데, 내용들이 꽤나 흥미롭다. 내용이 좀 더 쌓이면 허저씨 특집 편을 작성해 봐야지.

대표님에게는 온, 오프라인으로 숙소 운영하는 방법들을 자문해 주더라. 대표님도 허저씨의 말을 가볍게 듣지 않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나는 옆에서 그들이 하는 말을 꼭꼭 씹어먹고 있다. 다 살이 되고 피가 될 정보들.


펜션 브랜드 이미지와 숙소 인테리어 관련해서 돕고 있는 실장님? 도 한 분 있다.

대표님과 어떻게 인연이 닿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표님의 말로는 감각이 있으신 분이라 큰 힘이 될 거라고 한다.


출근 첫날에 관리동에서 쓸 비품 보관용 천막을 다 같이 만들었는데 이 실장님의 남편도 짬을 내어 도와주었다.

내 드림카인 찌프차를 타고 다니는 산적 같은 남자. 경상도 사투리를 귀엽게 쓰는 그가 참 멋져 보였다.

실장님도 성격이 좋아 보였는데 아주 잘 어울리는 부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쪼록.. 이 사람들과 좋은 인연이 되길 바란다.



출근 둘째 날엔 대표님과 투숙객을 받기 위한 준비를 함께했다.

비가 오는 날에 점심도 잠시 거르고 열심히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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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예전에 사무실 청소를 했던 경험, 도자기 작업장에서 일했던 경험들을 활용해서 의견을 제시하고 맡은 일을 착실히 수행했다.


3시가 조금 넘었을까. 대표님은 간식을 건네주며 돌멩씨 없었으면 큰 일 날 뻔했다며 오늘 나와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했다. (감동 +1)


그래 당신.


딱. 대.



오늘은 이전에 잡아둔 알바가 있어서 펜션일은 쉬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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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주관 업체에서 주소를 잘못 알려주는 바람에 나를 포함한 참석 인원 반 정도는 다른 주소로 도착했다.

맞는 주소까지 차로는 3분이 안 걸리는 거리지만 택시 타고 오거나 자전거 타고 온 사람도 있던데..ㅋㅋㅋ

서로서로 차를 얻어 타는 장면을 보고 '여전히 마음이 아름다운 우리나라.'를 느꼈다.


오늘의 일터는 안 그래도 전부터 와봐야지 했던 유적지였는데 이것 참 멍멍 꿀이다.

바람이 조금 차가웠지만 (내복 꺼내 입길 잘했지.) 공기가 얼매나 산뜻하던지 기분이 좋았다.

왕의 무덤이니 풍수가 얼마나 좋으려나 기대가 된다. 역시나 조경 끝내주는 나무들과 잘 만들어진 정원이 인상적이다.


아주머니들 사진을 찍어주며 대기를 좀 하다가 의상을 받아 갈아입었다. 옷도 사실상 생활 한복에 가까워서 너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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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 역할은 내시 2.

청색 부채? 를 들고 가마 뒤를 따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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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던 동네 휴학생은 거대한 양산을 들고 가던데 ㅋㅋㅋ 수고해라 친구여.


의상을 갈아입자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이거 돈 내고 체험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ㅋㅋ

오전이면 일이 끝나니 기분 좋게 집 가서 할 거 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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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라고 해봐야 말 그대로 행렬 재현을 하는 거라 정말 뭐가 별로 없었다. 대기 시간이 좀 길어서 그렇지.

왕에게 향을 올리는 행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실제 왕손을 보았는데 참 복스럽게(?) 생기셨다고 생각했다. 코도 크고 귀도 큰 할아버지. 아무쪼록 건강하세요.



행렬이 끝났다. 허리가 좀 아프긴 하네. 옷을 반납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

배가 고파서 집에 들어가기 전 근처에서 뼈해장국을 먹었다.

KakaoTalk_20250408_233156627.jpg 크으으으아



오랜만에 화요일에도 일기를 올린다.


다시 정신 기강 잡고 일기 주 2회 연재하고!

작년 12월 이후 멈춰버린 내 소설도 바삐 작업해야겠다.


내일 펜션 일을 위해 어여 자자.

고생 많았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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