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예측이 무의미한
'왜? 막상 동굴에서 나오고 보니까 몸이 덜덜 떨리지?'
'너는 아플 여유도 없어. 내일을 보고 살았어야지.'
'네가 건조하는 낭만이란 놈의 배가 그런 거야. 그저 평범하게만 사람들 따라갔어도 괜찮았을 걸.'
"이미 어긋난 톱니로 뭘 흉내를 내겠어. 백날 천날 지껄여 봐라. 네 비아냥 따위 담아 갈 주머니는 없어."
# 함께 하면 더욱 좋을 플레이리스트
https://www.youtube.com/watch?v=I4DRiN5wmto
<저녁 06:48 - 선선한 칠합/로파이 비트 플레이리스트 @낮달>
이번 주말의 펜션은 만실이다. 주중엔 바삐 움직여 개장 준비를 했다.
오늘 하루도 거의 끝나간다. 허리는 좀 아프지만 버틸만하다. 집에 돌아가서 영상 편집 해야지.
청소가 끝나고 시간이 좀 남았다. 기존 객실에 있던 행거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멀대표가 새로 주문한 행거를 만드느라 연장 근무를 하게 됐다.
그래. 나온 김에 돈 만 원이라도 더 벌고 가면 좋지.
육각 렌치로 결합하는 행거인데, 전동 드릴이 없어서 시간이 꽤 걸린다. 오늘 다 만들지는 못 할 것 같은데..
그때 멀대표가 그만 마무리 짓자고 말한다. 손이야.. 허리야..
주변 정리를 하고 집에 가려는데 멀대표가 말한다.
- 돌멩씨, 시간 있어요? 저녁 식사 같이하고 가시죠?
잘 됐다 싶어 그러겠다고 했다. 한 끼 때우고 가면 좋지.
근처 식당에서 먹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지역에서 이름난 펜션을 잡아두었단다.
정황을 살펴보니 멀대표가 경영자 수업을 들을 때 함께 들었던 사장님이 운영하는 펜션이라는데, 답사 겸 해서 일찍이 잡아두었던 약속이라고 했다.
이래저래 내 시야를 넓혀주려 마음 써주는 멀대표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우리 펜션에서 한참 북쪽에 위치한 펜션으로 나와 멀대표, 다이어터가 출발했다.
펜션에 도착하기 전, 근처 하나로마트에서 장을 봤다. 다이어터가 본인이 쏘겠다며 먹고 싶은 거 다 사라고 한다. (제법 통이 크시군?)
내일은 토요일이라 훨씬 바쁠 예정이니 술은 안 먹겠다고 했는데, 막걸리를 먹자고 하니 혀가 달달 떨렸다.
합법적 음주가 가능하던 때부터 사랑해 마지않았던 주종이라.. 모양 빠지게 직전의 선언을 깨고 나름의 지식을 뽐내며 즐거운 마음으로 막걸리를 골랐다.
멀대표와 다이어터는 돌멩씨랑 막걸리가 참 잘 어울린다고 했다. (칭찬이야 욕이야? ㅋㅋ)
꽤 먼 거리를 다시 이동했다. 여기는 확실히 기온이 낮아선지 아직 벚꽃이 새근 잠들어 있었다.
멀대표는 일정이 끝나고 대리 타고 집으로 가느니 빈 방이 있으면 차라리 함께 자고 가자고 했다.
그래. 그게 마음 편하고 좋겠네.
여기 펜션은 확실히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맛이 있었다. 얼마인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재방문율이 높은 곳이라고 하니 잘 되는 이유가 있겠지.
평일에도 점유율이 70%에 다다를 정도로 성행했으나, 개업 5년 이래 지금은 예전과 같지 않다며 푸념하는 펜션 사장님을 만났다.
그에게 시설 소개와 향후 계획들에 대해 설명을 듣고 나서 바비큐 파티를 준비했다. 이따가 본인도 잠시 들르겠다고 했다.
한창 자리가 무르익고 펜션 사장님도 자리해서 함께 식사를 했다.
멀대표와 펜션 사장님의 사업 얘기가 이어졌다. 나도 일개 알바생이 아닌 사업 준비 청년인 양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그도 나를 알바생이라고 얕보지 않고 진지한 태도로 답해 주었다. (앞으로 애견 미용실이 뜬다고 합니다 여러분. 귀담아들으셨다가 투자를..ㅋㅋ)
한참 얘기가 이어지다가 와인 한 잔 하면서 더 얘기하자길래 펜션 조식 장소로 이동했다.
이 때는 펜션 사모님도 함께 자리했다. 부인 분은 전직 의류 디자이너였는데, 전반적인 펜션 분위기를 담당하고 있고 이곳의 명물인 조식을 준비한다고 했다.
그녀의 멋스러운 감각이 이곳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구나.
우리는 모스카토를 고급스러운 안주와 함께 받아 마시며 한 차례 더 사업 얘기가 이어졌다.
기분이 좋아진 펜션 사장님은 추가로 운영하고 있는 프리미엄 숙소를 구경시켜 주겠다며 우리를 안내했다.
이건 뭐,,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집 저리 가라다. 여기가 4인? 6인? 기준 평일 80만 원대라고 한다.
이런 곳에서 가족들, 친구들과 모여서 소중한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2층 집에 수영장이며, 개별 바베큐장이며, 뭐며 그렇다 치고, 넓디넓은 주방이 참 탐이 났다. 나를 보고는 펜션 사모님이 말했다. 주방 보고 감탄한 남자는 내가 처음이란다.
아.. 증말로 드넓은 주방을 가지고 싶다.. 나는 할 수 있다...!!!
펜션은 따뜻했고 우리는 피로했다.
간 밤에 회복을 잘했던 건지 혹은 술을 덜 마셨는지 숙취도 없이 개운했다.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출근을 해야 하니 멀대표에게 먼저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여기 조식을 경험해 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우리 투숙객 퇴실 시간도 1시니까 출근 시간을 조금 늦춰도 괜찮으니 같이 먹고 가자고 했다.
여기 조식은 정말 대단했다. (몇 년 만에 이렇게 제대로 된 아침을 먹어보는 건지..?)
산뜻한 공기를 마시며 먹는 조식에 감탄이 이어졌고, 우리가 갈 길이 멀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했다.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다시 한옥 펜션으로 향하는 길.
대망의 토요일이다. 사실상 처음 준비하는 만실.
청소를 맡은 로사님과 서글이도 출근했다.
자, 가보자고!
아,, 그런데 이걸 우짜나.. 우리의 짐꾼 사륜이가 죽었다.. 당최 시동이 걸리질 않는다.
사륜이 2호가 어제 도착하긴 했지만 이 친구는 뒤에 짐칸을 꽂는 장치가 없다..
아 진짜 어떻게 1톤 트럭 못 구하나.. 아니면 박스카라도 리스를 하던지..
여기 펜션은 각 객실 사이가 언덕으로 조성되어 떨어져 있다. 동선이 멀어지니 3~4배는 더 힘이 든다.
바쁠 때는 갑갑해서 자차를 이용하는데, 여기 모두가 그렇게 움직이고 있으니 할 말이 없다.
조만간 좋은 날이 오겠지..?
개장 준비가 끝이 보이는 가운데 속속들이 투숙객 분들이 도착한다.
여기에서 처음 느껴보는 시끌벅적함. 마치 얼뜨기들이 처음 문을 여는 식당인 듯 정신없이 응대를 한다.
일부 객실에서는 개미 때가 출몰했다. 양해를 구하고 구비된 약을 친다.
한쪽에서는 배고파 돌아가시겠다며 바비큐 준비를 재촉한다.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 이거 고객 후기 어떻게 감당해..?
이런 아마추어 응대를 내가 투숙객이었다면 눈 감아 줄 수 있었을까..?
다행히도 재개장 준비가 한창이라는 걸 알고 있는 투숙객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뽈뽈 돌아다니는 우리를 응원해 주는 분위기다.
이번엔 다이어터에게 톡이 도착했다.
5호실 세면대 수도꼭지가 갑자기 말썽이란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지 일단 가보겠다고 했다.
현장에 가보니 꼭지에서 이상한 방향으로 물이 튀어나오고 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투숙객들 식사가 끝나기 전에 조치해내야 한다...
조일 수 있는 거.. 몽키... 테프론.. 아 저 니퍼로 일단 조여보고.....
다시 호실로 찾아가 양해를 구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핑크퐁인지 퐁퐁인지를 보며 춤추고 있다. 고기 먹고 놀라며 아이를 부르는 엄마들을 지나쳐 화장실로 들어간다.
다행히 별 일은 아니었다. 니퍼로 헐거워진 마개를 조이니 물이 새지 않는다. 다행이다..!
이건 뭐, 앞으로 멀대표와 다이어터, 요 서울깍쟁이들 커버하는 게 내 역할이겠구나.
상황이 어느 정도 일단락 되었다. 터덜터덜 관리동에 모인 세 사람.
TV가 왜 안 나오냐는 불평에 바비큐 서비스로 무마했던 호실에서 주신 가리비 양념 구이를 먹으며 한숨 돌린다.
지금 씹고 있는 게 가리비인지 가래떡인지 모르겠는 우리는 상주 직원이 필요하다는 공통 의견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너무 개장 초기라 상주 직원을 모시기에는 계산이 맞지가 않는단다. 월 객실 점유율이 30%는 넘어야 가능할 것 같다고 하는데..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이 셋이서 빨빨빨.. 예정입니다.
그래도 나름 전우애가 생기긴 한 것 같은 토요일 밤이다.
슬슬 마무리 짓고 퇴근하려는데 일이 터졌다.
툇마루가 파손되어 투숙객이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다! 으어어어어ㅓㅇ
상비약을 챙겨 들고 서둘러 객실로 향한다.
상황을 살펴보니 시간이 흘러 노후화된 툇마루 사이가 벌어지면서 이음새 부분이 무너진 것이다. (한옥 참 관리할 부분이 많구나..)
다친 사람은 음주 상태라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다행히 상처는 경미해 보였지만, 알고 보니 이들은 재 개장 이전부터 자주 찾았던 고객이었고, 우리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확인하지 못했던 실수인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다음 날 상태를 보고 금전적 조치를 취하기로 하고 상황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내일은 월요일.
펜션 일을 쉬어가는 날이다.
충전이 된 몸을 가만히 둘 수는 없고 일을 해야 해.. 내일은 과연 무슨 일을 하게 될까...?
이번에 구한 일자리는 대형 마트 물류 센터다. (이건 뭐 동네 일자리가 대부분 물류 센터다.)
시간은 10시부터 19시까지. 식비 포함 일급 12만 원.
오늘은 종일 비가 오는데 마침 실내에서 하는 일이라 좋다.
쉬어가는 날이지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 이대로라면 다음 달 카드 값은 빵꾸야..
하루에 두 탕을 뛰어야 하나. 이래서야 내년 초에 이사는 어떻게 간담..
맡은 일은 피킹, 패킹, 래핑. 핑핑핑 3연핑이다.
일 하러 온 사람들에게 오늘 출고되어야 하는 상품들이 적힌 문서를 나눠준다.
남녀 구분 없이 하는 일이라 무게가 그리 무겁지도 않다. 끌차에 박스를 싣고 그 박스에 상품들을 찾아서 관리 직원에게 검수를 받으면 된다.
이건 뭐 완전 꿀인데...? 하는 생각도 잠시, 모두 출고 장소로 내려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여사님들은 대부분 상품 박스 포장에 투입되었다.
저건 증말 하기 싫다. 1년 동안 지겹도록 도자기 택배를 쌌으니까. 다행히 나는 마무리 업무를 맡았다.
레일을 따라 줄줄이 모여드는 택배 박스들을 크기별로 파레트에 정리하고 / 내 키만큼 박스가 쌓이면
그걸 무너지지 않게 랩으로 감은 뒤 / (와,, 랩 감을 때는 어질어질하긴 하더라..) 지정 장소에 적재해 두면 되는 일이었다.
점심시간 전까지는 박스 양이 많지 않아서 차분하게 몸을 움직여도 그렇게 부담이 되지 않았다.
당분간 펜션 일 빵꾸 날 때마다 여기 물류 센터에 오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관리 직원이 혼자 하기 힘에 부치면 바로 얘기해 달라고 했는데,, 그땐 그 이유를 몰랐지..
점심시간.
일일 알바생 중 나 혼자만 구내식당에 왔다.
한 끼 5,600원인데 밥도 나름 괜찮은 것 같다.
왜 다들 편의점 가지..? 영양 넘치는 계란도 있고 먹을 만 한데.
급식도 짬밥도 잘 먹어왔던 나에게는 나쁘지 않은 점심이었다.
(오히려 우리 대학교 학식보다 낫다.)
오후 일이 시작 됐다.
아까 관리 직원이 했던 말의 이유를 알 것 같다.
어느 틈엔가 박스가 갑자기 물 밀 듯 밀려온다. 내 동선이 여기저기로 길어지면서 금세 레일에 택배가 가득 찼다.
이렇게 되면 포장 여사님들이 일을 진행할 수가 없게 된다. 잘 굴러가던 바퀴가 멈춘다는 소리다.
이야, 이거 꽤 정신이 없다. 파레트에 올리는 박스 정리도 익숙지 않아서 더 허둥댄다.
그때마다 관리 직원들이 여기저기서 달려와 도와준다.
폐급이 된 것만 같은 이 기분.. 약간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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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 시쯤 지나자 일이 손에 익는다.
나름대로 차분하면서 간결하게 착착착.
진짜 고수들이 보면 웃음이 나오겠지만.. 역시 사람은 하면 할수록 실력이 는다!
오늘 일도 이렇게 끝. 차로 돌아가는 중에 바로 일당이 입금되었다. 되게 빠르네.
4월 달의 하루하루가 예상한 것보다 녹록지 않다.
여전히 미성숙하게도 긍정의 눈으로 내일을 보기에 그런 건가.
하긴,, 지레 겁부터 먹고서 무슨 일을 하겠어.
다시 마음 가다듬고 내 할 일을 충실히 하면 된다.
아무리 상황이 이래도 전라도에서 컨테이너 만들 때보다, 요업에 있을 때보다 마음 편하니까..
아자아자다!
내일은 나와 피글렛 모두 쉬는 터라, 피글렛이 내가 사는 곳까지 와주기로 했다.
어질러진 집으로 달려가 집안일하고서 그녀를 데리러 가야지.
날이 추우니 집에서 치맥이나 하자고 말해야겠다.
한 주 간 고생 많았습니다.
푹! 쉬자. ~_~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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